퀵메뉴버튼 퀵메뉴버튼 최상단으로 가기

세계의 독립운동

인도네시아 독립 운동사

세계의 독립운동

인도네시아 독립 운동사

인도네시아공화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오세아니아까지 이어진 섬나라로 네덜란드와 일본의 지배를 받았고 끊임없는 민족운동으로 독립을 추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 글. 소병국(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

‘세계의 독립운동’에서는 대한민국과 아시아 다른 국가들의 〈독립운동〉이라는 동일한 역사 경험을 공유하여 세계사 흐름 속에서 대한민국을 이해하고 우리 독립운동의 가치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또한 우리와 각 나라가 독립운동을 기억하는 방식을 보고 독립운동을 기억하는 이유를 돌아볼 기회가 될 것입니다.
- 편집자-

자바 전쟁이 끝난 후 디포네고로 왕자가 체포되는 모습 기록화

현재 인도네시아공화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오세아니아까지 이어진 섬나라로 17,000개 이상의 섬이 있으며 세계에서 14번째로 넓은 나라이자 4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주요 교역 통로에 위치한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와 일본의 지배를 받았고 끊임없는 민족운동으로 독립을 추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디포네고로 전쟁

1815년에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자, 네덜란드는 전쟁 중에 영국에 망명 정부를 세우고 위탁했던 자바의 영토를 반환받았다. 이때부터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식민 지배에 착수하면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 도입을 추진했다. 그러자 자바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특히 자바의 임대차 관습법이 흔히 무시되어 많은 귀족과 농민의 반발을 샀다.
이즈음에 인도네시아 역사상 손꼽히는 위인인 디포네고로가 자바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자바의 상황이 점차 악화되자 마따람 왕국의 장자 왕자로서, 그리고 이슬람 신비주의자로서 자바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디포네고로 주위에 추종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825년 디포네고로가 반反네덜란드 봉기를 일으키자, 네덜란드의 개혁에 불만을 품고 있던 많은 농민, 귀족과 이슬람 지도층이 동참했다. 봉기는 욕야까르따에서 발발해 곧 중부와 동부 자바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하지만 1830년 3월에 디포네고로가 체포되어 술라웨시의 마까사르로 추방되면서 그 기세가 급격히 꺾이기 시작했다. 그는 1855년에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근대 민족주의 운동이 태동하기 이전에 네덜란드의 식민 지배 착수에 대한 인도네시아 전통 세력의 저항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1825∼1830년까지 5년간 지속되었던 이 봉기를 ‘자바전쟁’ 또는 ‘디포네고로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전쟁을 계기로 자바 전역에서 확고한 지배권을 장악한 네덜란드는 이제 이 지역을 발판 삼아 인도네시아군도 전역으로 식민지 확장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슬람,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인도네시아 근대 민족주의 운동은 중국인에 대한 경제 투쟁을 내세운 이슬람 단체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1909년에 전직 공무원인 띠르또아디수르요가 바타비아(지금의 자까르따)에서 ‘사레깟 다강 이슬라미야(무슬림 상인 연합회)’를 설립했다. 바띡(전통 방식으로 염색한 천) 산업에 종사하는 자바의 토착 자산가 단체로서 그 설립 목적은 당시 바띡 산업에서 지배력을 확장하고 있는 중국인에 맞서는 것이었다.
1911년 띠르또아디수르요의 권유로 사만후디가 수라까르따(지금의 솔로)에서 ‘사레깟 다강 이슬람’(이하 SDI)이라는 또 하나의 토착 자산가 단체를 만들었다. SDI는 이어 오마르 사잇 쪼끄로아미노또에 의해 ‘사레깟 이슬람’(이하 SI)으로 재건되었다. 이후 SI는 중국인과의 경제 투쟁을 넘어 식민 정부에 자치를 요구하는 정치 투쟁으로 그 노선을 변경했다. SI는 오마르 사잇 쪼끄로아미노또의 지도력 하에 1920년대 초까지 인도네시아 자치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 운동은 급진적인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노동 운동 지도부 가운데 종전 인도네시아 반식민지 운동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사상 즉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 사상은 네덜란드인 공산주의자인 스네이블리트에 의해 처음 유입되었다. 1914년 5월 그는 수라바야에서 동인도사회민주연합(이하 ISDV)을 창설했다. 1917년에 100여 명 정도의 인도네시아인이 가입했다. 그들 중엔 뒤에 인도네시아 대표적인 공산주의자가 되는 스마운·딴 말라까·무쏘·다르소노 등 젊은 활동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1920년 5월에 ISDV를 ‘동인도공산주의자연합’으로 개칭했다. 이렇게 해서 중국공산당(1921년)보다 일찍 아시아 최초의 공산당이 인도네시아에서 탄생했다. 그들은 4년 뒤 당의 명칭을 인도네시아공산당(이하 PKI)으로 변경했다.
1925년에 접어들며 여러 도시에서 PKI가 주도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1926년 11월~1927년 1월 초에 PKI는 서부 자바와 수마뜨라의 미낭까바우에서 여러 차례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이 일련의 사태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르소노 등 PKI 간부와 노동 운동 지도자들을 포함해 약 1만 3000명이 체포·투옥되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첫 번째 반식민주의 무력 투쟁은 실패로 끝나면서 PKI는 거의 괴멸되었다.
1920년대에 이슬람과 공산주의 색채를 띠지 않은 이른바 ‘세속적’ 민족주의 단체들이 인도네시아 국내외에서 나타났다. 국외에선 모함마드 하따를 위시한 네덜란드에서 유학 중이던 인도네시아 학생들이 주축을 이뤘다. 그들은 1922년에 민족주의 정치 단체인 인도네시아협회(이하 PI)를 출범시켰다. 한편 이 무렵 국내에선 수까르노가 그와 유사한 민족주의 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1925년 수까르노는 찝또 망운꾸수모와 함께 반둥스터디클럽을 결성했다. 1927년 7월 4일 이 클럽의 주도로 서부 자바의 고원 도시인 반둥에서 인도네시아국민협회가 결성되었다. 1928년 5월 이 협회는 인도네시아국민당(이하 PNI)으로 개칭했다.
PNI는 인도네시아 통합을 도모하고, 식민 당국과 타협·협력을 하지 않으며, 대중 운동을 통해 인도네시아 민족주의를 고양해 독립을 달성하는 것을 그 투쟁 목표로 정했다. 1929년 말까지 PNI의 당원이 급속히 증가해 그 수가 1만 명에 달했다. 1929년 12월 식민 당국은 수까르노를 비롯해 PNI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수까르노는 공공질서를 해쳤다는 죄목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반둥의 수까미스낀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PNI는 식민 당국의 강력한 탄압을 예상하고 1931년 4월 자진 해산했다. 네덜란드 유학생 집단은 1931년 12월에 PNI의 자진 해산을 비난하며 인도네시아국민교육, 약칭 PNI-Baru(새로운 PNI)를 설립하고 하따를 당수로 추대했다. 1934년 2월에 모함마드 하따도 체포되어 파푸아의 보벤 디굴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처럼 식민 정부의 강력한 탄압으로 1934년 말까지 반식민주의 지도자들 대부분이 구금되었고, 비타협을 지향하던 반식민주의 민족주의 운동은 사실상 인도네시아에서 설 땅을 잃게 되었다.

민족주의 운동의 새로운 전기

중일전쟁(1937∼1945)의 장기화로 석유·주석·고무 등 전략 물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일본은 새로운 공급지가 절실한 상황에서 시선을 동남아시아로 돌렸다. 그 중 전략 물자 보고인 인도네시아군도가 그들의 주요 관심 지역이었다. 일본은 1942년 3월 8일 동부 자바의 깔리자띠에서 네덜란드 총독의 항복을 받아 인도네시아 점령을 마쳤다.
1943년 초부터 전세가 일본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군정은 준군사 조직을 만들어 대중 동원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그해 4월에 보조군인 헤이호(병보兵補)가 조직되었고, 유사한 조직이 연이어 생겨났다. 10월에 약칭 뻬따로 불리는 조국방위군이 창설되었다. 또한 일본은 각종 협회를 구성했다. 1943년 10월 인도네시아무슬림협회(약칭 마슈미)가 창립되었다.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 군정은 인도네시아 독립 운동 지도자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 그들에게 ‘독립’이란 미끼를 던졌다. 이에 1945년 3월 그들은 인도네시아독립준비위원회(이하 BPUPKI)를 설립했다. 5월 말 BPUPKI의 첫 번째 회합이 자까르따에서 열렸다. 수까르노와 모함마드 하따 포함해 참석자들은 이 회합에서 향후 이슬람 국가가 아닌 세속 국가를 세우기로 최종 합의했다. 이에 따라 6월 1일 수까르노는 한 연설에서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핵심 국가 이념인 다섯 원칙 즉 빤짜실라(인도네시아의 통일, 공정하고 문명화한 인본주의, 합의제와 대의제를 통한 민주주의 실현, 인도네시아 국민에 대한 사회 정의, 유일신에 대한 믿음)를 발표했다.
1945년 8월 6일 수까르노와 하따를 각각 의장과 부의장으로 하는 독립 준비 실무 위원회가 발족했다. 하지만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상황이 벌어짐에 따라 그동안 일본과 인도네시아 독립 운동 지도자들이 논의해왔던 모든 독립 준비 계획이 중단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급진적인 청년 집단은 즉각 독립을 선포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수까르노는 8월 17일에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성공한 독립 혁명

1945년 8월 17일 독립 선언에 이어 8월 말 자까르따에 인도네시아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네덜란드의 복귀가 임박하자 공화국 정부의 지도자들은 대책 마련에 부심하기 시작했다. 일단 투쟁보다는 협상을 염두에 두고 1945년 11월에 친네덜란드 인사인 수딴 샤흐리르를 내무 장관과 외무 장관을 겸한 수상으로 하는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었다.
1946년 11월 15일에 수딴 샤흐리르와 네덜란드가 링가자띠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의 골자는 인도네시아공화국의 주권을 자바·마두라·수마뜨라로 한정하고, 그 밖의 지역에 대한 네덜란드의 지배권을 인정하며, 양측은 1949년 1월까지 네덜란드연방의 수립을 위해 함께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인도네시아공화국은 군도의 일부만을 차지하는 소국이 되었다. 이 굴욕적인 협정의 여파로 결국 1947년 6월 26일 수딴 샤흐리르는 수상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또 다른 친네덜란드 인사인 아미르 샤리푸딘이 새로운 수상이 되었다. 그러자 7월 20일 네덜란드는 15만 명 규모의 군대를 동원해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1948년 1월 아미르 샤리푸딘은 자까르따의 딴중 쁘리욱 항구에 정박해 있던 미국 군함 렌빌에서 네덜란드와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른바 ‘렌빌협정’은 인도네시아공화국에게 네덜란드연방 내의 한 주권국으로 지위를 부여하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이는 인도네시아공화국이 네덜란드연방 내에서 자바와 수마뜨라의 일부를 다스리는 일개 지방 정권으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협정의 후폭풍으로 아미르 샤리푸딘 내각도 무너지고 말았다. 이 같은 정치적 위기는 수까르노와 모함마드 하따를 다시 정치 일선에 복귀하게 만들었고, 모함마드 하따를 수상과 치안 장관으로 하는 비상 내각이 발족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하는 수카르노 (1945. 8. 17.)

1948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의 약진이 목도되었다. 내전 중인 중국에서 공산당군이 국민당군을 압도하기 시작한 데다, 소련의 베를린 봉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세력의 쿠데타 등이 서구 자유주의 진영을 긴장케 했다. 이러한 가운데 1948년 9월 초에 전후에 재건된 인도네시아 공산당 지지자들이 동부 자바의 마디운을 점령하고 인도네시아사회주의공화국을 선포했다. 이에 대한 수까르노의 결정은 단호했다. 9월 말 인도네시아 공화국 군대의 주축인 실리왕이 사단이 마디운으로 진격해 치열한 전투 끝에 공산당 세력을 진압했다.
이른바 ‘마디운 쿠데타’는 특히 국제적으로 인도네시아 독립 투쟁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이 사태는 당시 세계 도처에서 공산주의가 약진하던 가운데, 인도네시아공화국 정부가 반공산주의 체제라는 것을 서방 세계에 분명히 각인해 주었다. 이 쿠데타 진압을 기점으로 그동안 수까르노를 사회주의자로 의심해온 미국을 포함한 자유주의 진영이 인도네시아 독립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공화국 정부를 전복하려고 1948년 12월 10일 또 한 번의 대대적인 군사행동을 감행했다. 이 무렵 네덜란드의 무력 행동은 국제 사회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특히 미국은 네덜란드에 대한 원조를 연기하고, 마셜플랜에서 네덜란드를 제외하겠다고 압박했다. 결국 1949년 8월 23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원탁회의에 따라 12월 27일 수까르노와 하따를 각각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한 인도네시아연방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인도네시아의 독립 혁명이 결실을 맺었다. 요약하면, 독립 투쟁 운동의 내적 동력과 유리한 국제 환경이 결합되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나라인 인도네시아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국기를 들고 독립기념행사에 참가한 인도네시아 청년들 (2023. 8. 17.)

하리 머르데까

매년 8월 17일이 되면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하리 머르데까’(독립기념일)를 기념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행사를 많이 개최한다. 우리나라의 엄숙한 광복절보다는 축제 분위기가 난다. 특히 국기(‘상 메라 단 뿌띠’) 색상으로 매치한 빨갛고 하얀 옷을 입고 흥겹게 이벤트를 벌이는 장면이 이채롭다. 아마도 혁명을 통해 독립을 쟁취했다는 그들의 자부심의 발로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