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에서 온 소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동맹국에 승인을 요구하다
— 글. 최정준(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동맹국에 승인을 요청한다는 소식을 전하는 『독립신문(충칭판)』 (제2호, 1944. 8. 15.)
대한민국 임시정부 마침내 충칭重慶에 정착, 체계적인 승인 외교활동을 시작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하이에서 수립되어 1945년 해방을 맞아 환국할 때까지 27년 동안 중국에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는 대내외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서 대일항쟁 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최초 상하이上海에서 수립되었으나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본거지를 10차례 이동한 후 1940년 9월 충칭重慶에 정착하였다. 충칭에 정착한 후 임시정부는 정부의 조직을 당黨·정政·군軍체제로 정비하였다. 즉, 민족주의 세력을 결집하여 한국독립당으로 통일을 이루었고, 정부의 지도 체제를 집단지도 체제에서 단일지도 체제로 변경하였다. 또한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을 창설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한 군사정책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1942년 좌익진영의 독립운동 세력이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함으로써 임시정부는 정치와 군사적으로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지휘 통할할 수 있는 최고기구이자 민족의 대표 기구라는 위상과 권위를 되찾게 되었다.
충칭에 정착한 이후 임시정부는 연합국으로부터 임시정부를 승인받기 위한 승인 외교활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였다. 승인 외교활동은 중국과 미국을 주 대상으로 하여 이루어졌으며, 임시정부의 공식적인 활동과 더불어 민간 차원에서도 이루어졌다. 1944년 8월 15일 『독립신문』에 실린 「한국 임시정부, 동맹국에 승인을 요구하다」 기사는 1944년 8월 21일부터 10월 7일까지 미국 워싱턴 D.C에서 전후 처리를 위한 연합국 4개국의 덤바턴 오크스(Dumbarton Oaks) 회의 개최에 맞춰 발표되었다. 이 기사에는 임시정부는 한국 민족과 국가를 대표하는 최고기구이며, 동맹국들이 임시정부로서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또한 임시정부로 승인을 받게 되면 한국 민족을 대표하여 동맹국의 구성원으로서 자격을 얻고 물자 원조를 받아 한국 국내외의 항일투쟁과 항일전쟁을 전개해 동맹국의 승리와 한국의 독립을 촉진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기사는 충칭 시기 임시정부가 추진하였던 승인 외교활동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충칭 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전개하였던 승인 외교활동을 중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문서 (1942.1.30.)(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2』, 대중국외교활동, 2008, 172쪽.)
중국국민당 정부와 한중문화협회를 통해 한국의 독립과 임시정부 승인을 교섭하다
충칭에 정착 이후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와 교섭하기 위해 중국국민당과 협조 체제를 유지하였고, 대중국 외교활동 목표는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과 재정 지원 문제가 주를 이루었다. 1940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자 12월 10일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 선전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성명서를 통해 한국도 일본에 대항하여 반침략 전선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임시정부는 연합국과 함께 하나의 전투 단위로서 일본과 전쟁을 전개한다는 것을 선언하였다. 임시정부는 대일 선전포고문을 발표한 후 이를 중국 정부에 통보하고 한·중 두 나라가 선봉에 서서 승리를 가져오기 위한 노력을 전개할 것을 요청하였다.
1941년 10월 중국은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단일화한다는 것과 함께 “임시정부 승인 문제를 영국·미국 정부와 협상하고 중국의 국무회의에도 제출하겠다”라고 밝혔다. 중국은 그동안 독립운동 세력이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임시정부를 지원하되 승인하고 있지 않았는데, 좌우합작을 전제로 임시정부를 승인할 수 있다는 뜻을 비춘 것이었다.
중국 측의 태도 변화에 따라 임시정부는 1942년 1월 30일 김구 주석 명의로 장개석蔣介石에게 「관어승인한국임시정부지절략關於承認韓國臨時政府之節略」을 제출하였다. 김구 주석은 이 요청서에서 국제정세가 반침략 진영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지금이 임시정부를 승인할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강조하였다.
임시정부의 지속적인 승인 요청에 따라 중국국민당 조직부는 임시정부의 승인을 여러 차례 중국 정부에 건의하였다. 예를 들어 조직부장 주가화朱家驊는 1942년 두 차례에 걸쳐 장개석에게 중일전쟁이 발발한 7월 7일 또는 쌍십절(10월 10일)을 기념하여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임시정부의 공식 승인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는 김구 주석을 비롯한 전 국무위원 명의로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공문을 장개석에게 보내 중국 정부가 솔선하여 임시정부를 승인해 줄 것과 김구 주석이 장개석과 면담을 통해 임시정부를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을 앞두고 1943년 7월 26일 ‘김구-장개석 면담’에서 김구 주석은 “중국이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여 관철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장개석과 면담은 이후에도 몇 차례 더 이루어졌다. 김구 주석은 1944년 7월 3일, 장개석에게 서한을 보내 “한국 혁명동지들이 직접 전장에 나가 동맹국 군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적들과 싸우기를 원하고 있지만 동맹국으로부터 정식으로 승인을 받지 못하여 군사작전에 참가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임시정부 승인을 위한 노력은 1942년 외교부장 조소앙, 손문孫文의 아들 손과孫科 등이 결성한 한중문화협회를 비롯한 민간 차원에서도 이루어졌다. 한중문화협회는 강연회를 통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여 한중 합작과 임시정부 승인 문제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을 일으켰다. 특히 1943년 12월 카이로선언이 발표되자 한중문화협회는 동맹국에 조속히 한국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담화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중국이 임시정부에 대해 우호적인 견해를 보였으나 정식으로 승인하지 않았던 것은 미국·영국·소련 등 연합국들의 전후 한반도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독자적으로 임시정부를 승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중국은 임시정부 승인을 유보하였다.
임시정부가 워싱턴 회담측에 보내는 승인요청서 (1944.8.13.)(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20』 , 주미외교위원부Ⅱ, 2007, 396쪽.)
ⓒ독립기념관
한미협회에서 미국무장관에게 보낸 서한(1942. 5. 5.)
전방위적 외교활동을 통해 미국의 정·관계에 임시정부 승인 외교활동을 전개하다
임시정부는 미국에서도 임시정부가 정식 정부로 승인받기 위한 다양한 외교적 노력을 전개하였다. 대미 외교를 위해 임시정부는 1941년 6월 6일 주미외교위원부를 설립하였고, 임시정부 고위인사, 군사지도자, 민간 차원을 포괄하여 미국의 정·관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위한 외교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2월 11일 조소앙 임시정부 외무부장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한국 민족 전체가 반침략 운동에 참여하고 추축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며, 한국은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의 공동선언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라는 것을 밝히고 미국이 한국의 독립 정부를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1942년 9월 29일 한국광복군 지도자인 이청천과 김원봉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적절한 지원을 해주면 연합군의 전투력이 증강할 것이며, 승리를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1944년 6월 17일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부장이 미국 대통령, 부통령 그리고 국무장관에게 서한과 비망록을 보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특히 비망록에서 임시정부의 잠재력과 임시정부를 승인해야만 하는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1944년 8월 13일 임시정부는 전후 처리 문제를 위한 워싱턴 4개국 회담(덤바턴 오크스 회의)이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요청서를 보냈다.
“(초략) 연합국들의 수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4대 강국의 긴밀한 합작 하에 우리 한인들의 인력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긴급한 요구사항을 승인해 주시길 바랍니다. 1. 한인 무장세력을 한층 더 강화할 것. 2. 우리들의 독립운동과 연락이 순조롭게 행해지도록 연합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당한 혹은 사실상의 정부로 승인해 줄 것.” (후략)
이 승인 요청서는 전세가 연합국 측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상황을 임시정부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과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승전국의 지위를 얻고, 정식 정부로서 국제사회로부터 승인을 받고자 했던 임시정부의 의지를 보여준다.
주미외교위원부를 통해서도 미국 대통령, 국무성, 국방성 등에 여러 차례 서한을 보내고 면담을 통해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과 무기대여법 적용을 요청하였다. 또한 한미협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가진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국무장관과 대통령에게 한국의 독립과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하였다. 예를 들어 한미협회 크롬웰 의장은 미 코델 헐(Cordell Hull) 미 국무부 장관에게 한미협회의 목적을 알리는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승인 문제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초략) 사실상의 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은, 과거에도 그래왔고 현재에도 여전히,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대서양헌장이 말장난이 아닌 실천적인 것임을 증명하는 데는 정말로 좋은 기회입니다. (후략)”
위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의 독립에 우호적인 의견을 가진 미국인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이 가져올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러한 의견을 미국 대통령과 국무부에 지속해서 요청하여 미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압박을 가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러한 지속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요청에 대해 한국 문제가 인도를 포함해 다른 아시아 식민지 국민의 독립과 무관하지 않다고 인식하고, 한국에 대한 임시정부 승인은 부적절하다는 뜻을 고수하였다. 또한 미국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선언과 어느 특정 단체(임시정부)를 승인하는 문제를 별개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비록 임시정부의 승인 외교활동이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을지라도, 충칭 시기 임시정부는 연합국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국제정세를 활용할 줄 아는 안목과 역량을 보여주었다. 태평양 전쟁으로 변화된 전략 환경을 적확的確하게 분석하여 대응한 것은 오늘날 급변하는 안보 환경 변화에 맞춤식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아울러 미국과 중국 내의 다양한 친한 우호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정부 차원만이 아닌 민간 차원으로 외교 범위를 확장함으로써 의사결정자에서 다양한 정책 대안을 고려할 기회를 제공한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