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신규식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중국 외교
— 글. 배경한(전 신라대학교 사학과 교수)
잘 알다시피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에서 일어난 3·1운동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이후 국외 독립운동의 중심축이 되는 임시정부가 왜 상하이에 만들어졌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 시기 상하이 지역 한인들의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그럴 경우 1910년대 상하이 지역 한인사회의 형성 과정과 함께 그 중심 지도자 신규식을 만나게 된다.
대한제국의 무관 출신으로 서울에 있던 관립 한어漢語학교에서 중국어를 익힌 신규식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직후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했으나 순국하지 못하고 한쪽 눈만 잃은 비운의 인물이다.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으로 망국의 치욕을 경험한 신규식은 다시 한번 음독을 하지만 그마저 성공하지 못한 채 울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독립기념관
신규식
그러던 그가 1911년 12월, 당시 가장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였던 신민회新民會의 연락망을 통해 중국의 혁명 소식을 듣고 곧바로 중국행을 결심하였고 중국혁명의 중심지인 상하이上海와 난징南京으로 향했던 것이다. 흔히 잘못 알려져 있는 대로 신규식이 신해혁명 곧 우창기의武昌起義에 직접 참가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지만, 혁명정부南京臨時政府 성립 직후인 1912년 1월 난징 도착 이후부터 황씽黃興, 후한민胡漢民 등 혁명파 지도자들과 직접 교유하였고 혁명의 성공을 지지하기 위해 성금을 내는 등의 지원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신규식은 비슷한 시기에 상하이와 난징 지역으로 망명해온 한인 지사들, 예컨대 김규식, 박은식, 조소앙, 홍명희, 신채호 등과 함께 1910년대 상하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한인 독립운동의 중심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이들 초기 한인 망명자들은 난징과 상하이에서 동제사同濟社라는 단체를 만들고 유학생들의 어학 공부와 정착을 돕는 등 일련의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한편 베이징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화북 지역과 동북 만주 및 노령(러시아령 연해주) 지역을 포함한 해외 여러 지역의 한인 독립운동 세력과 연락망을 만드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 한편 이들 한인들은 중국인들의 지원을 얻기 위하여 다양한 교류를 추진하였으며 그 결과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라는 이름의 한중연대 조직을 만듦으로써 이후의 중국 내 독립운동의 기반을 구축했다. 신아동제사의 결성은 신규식 중심의 상하이 지역 한인들이 벌인 초기의 대중국 민간외교의 성과로서 이후 해외 독립운동의 주축이 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만들어지는 데에 기반이 되었다.
신규식을 비롯하여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대부분의 한인 지사들은, 중국 혁명에 참여하여 중국이 강성해지도록 도운 다음 그 중국의 지원을 받아 한국의 독립과 근대적 국가 건설을 이룩해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한인 지사들에게 중국혁명은 남의 혁명이 아니라 자신의 혁명운동이었으니 신해혁명은 중국 일국의 공화 혁명이 아니라 아시아 내지 동아시아의 공화 혁명이었던 것이다.
동제사 개천절 모임(1912. 11. 11.)(박정규 편저『조국광복과 민족혁명의 선구자 예관 신규식』, 예관편찬위원회, 2019, 50쪽.)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곧이어 강화 협상을 위한 국제회의가 소집되었는데 파리강화회의가 그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함으로써 세계 최대 열강의 지위에 오른 미국이 파리강화회의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가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민족자결주의는 원래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원인 가운데 하나였던 유럽 내 소수민족들에게 독립과 자주권을 부여하자는 주장이었지만 아시아 아프리카를 포함해서 세계 각지의 식민지 약소민족들에게도 민족 독립의 희망을 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해외 각지의 한국 독립 지사들에게도 민족자결주의 주장은 엄청난 기대를 안겨주었으니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중국 내 한인 지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중국 내에서 일본의 독점적 세력 확대에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던 미국은, 특사를 파견하여 중국의 파리강화회의 참여를 적극 권유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소식은 신규식을 비롯한 상하이 지역 한인 지사들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중국 정부에 제출한 청원서, 『진단주보』 기사(제6호, 1920. 11. 14.)
잘 알려져 있는 대로 상하이 한인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여운형이 신한청년당을 만들고 그 대표 자격으로 김규식을 파리에 급파하였고 김규식은 파리에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를 만들고 강화회의 참석과 독립 선전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일본이 승전국의 자격으로 발언권을 가지고 있던 강화회의에 한국 대표가 참석하도록 허용 받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으니 파리위원부는 회의장 밖에서 국제 여론에 호소하는 외교 선전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와 함께 주목해야 할 것은, 중국 내에서 신규식과 동제사 멤버들을 중심으로 전개한 청원 외교 운동이다. 김규식 대표 파견 당시 신규식은 항저우杭州에서 신병 치료 중이었는데 강화회의 대표 파견 소식을 듣자 바로 혁명파 정부가 있던 광저우廣州로 가서 강화회의에 한국 대표 파견을 지지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한편으로는 베이징 지역의 동제사 멤버들을 통해서 베이징 정부 측과 베이징 주재 미국공사관 측에도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청원 운동에 나섰다. 물론 이러한 청원 운동에 대한 중국 측의 대응은 거의 없었지만 다만 일부 중국인들 가운데 한국인들의 청원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의 대응은 이끌어 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및 중국을 상대로 한 청원 운동과 동시에 국내에서 대표 파견을 후원 지지하는 거국적인 반일 시위운동, 곧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3·1운동은 비록 많은 희생 끝에 실패했지만 국내외에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천명하였으며 상하이에 해외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들어지는 성과를 낳았던 것이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성립된 몇 달 뒤인 1919년 11월 해외 여러 지역의 임시정부를 통합하는 형식으로 출범하게 된 통합 임시정부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승만이 1920년 12월 상하이에 와서 취임하였다. 그러나 재정 문제를 비롯한 임시정부의 현안들을 해결하지 못한 채 이승만이 1921년 5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임시정부는 심각한 내분의 위기 속에 빠져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임시정부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른 것이 워싱턴회의였다.
쑨원
워싱턴회의는 1921년 7월, 미국 대통령 하딩(Warren G. Harding)이 제안한 다음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계속되고 있던 열강들 간의 군비경쟁을 조정하고 군비경쟁에 따른 각국의 경제적 부담을 축소하자는 공동의 목표에 열강들이 호응하면서 열리게 되었다. 특히 영일동맹의 존속에 대한 우려에서 나온 미국의 일본에 대한 견제 요구가 워싱턴회의 소집의 이면에 깔려 있었다는 점은 임시정부를 비롯한 한국 독립운동가들로 하여금 이 회의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에 대한 이의異議가 어떤 형태로든 제기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이승만이 떠난 뒤 국무총리 대리와 외무 총장을 겸하며 사실상 임시정부를 책임지고 있던 신규식이 1921년 9월 말 상하이를 떠나 약 두 달간 광저우를 방문하고 중국 혁명정부, 곧 호법정부의 최고지도자 쑨원孫文과 회담한 것은 바로 워싱턴회의 참가를 위한 대중국 외교활동이었다. 1921년 10월 10일에 이루어진 쑨원과의 회담에서 신규식은 임시정부에 대한 외교적 승인과 재정적 지원, 중국 군관학교에 한국 학생 입학 등을 요청하였다.
당시 호법정부 휘하의 비상 국회에서는 한국의 독립을 승인한다는 결의를 하였고 호법정부에서는 임시정부의 대표를 광저우에 주재하도록 허용하였으며 다수의 한국 학생들을 남방 정부 휘하 각성各省의 군관학교에 받아들이도록 하는 등 지원책에 동의하였다. 임시정부에 대한 외교적 승인은, 임시정부가 실제적인 지배권을 행사하는 영토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다만 호법정부 휘하 비상 국회에서 한국독립을 승인하는 결의를 한 것으로 본다면 “사실상의 승인”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당시 중국의 대표권을 가진 중앙정부가 베이징에 있었기 때문에 쑨원의 남방 호법정부 자체가 워싱턴회의에 참가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임시정부의 워싱턴회의 참가를 지원해 줄 여력은 없었다.
1910년대와 1920년대 초에 걸친 시기에 신규식을 비롯한 한인 지사들의 중국 혁명 참여와 그를 통한 중국의 지원을 얻어내는 것은, 사실상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중국 혁명 자체가 한국독립을 지원해 줄 만큼 순탄하지 못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 중국 중심주의, 곧 중화주의적 입장이 상당히 잔존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쑨원을 비롯한 중국 혁명파 지도자들의 경우에 표면상으로는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나타냈으나 전통적 중화주의中華主義적 영토 관념과 함께 한국을 중국의 영향력 아래 두거나 완충국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 호법정부의 사실상의 승인을 얻어내는 등 상당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신규식은 1921년 12월 상하이 귀환 이후 많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임시정부 자체가 재정 조달 등 기본적인 존립 기반을 가지지 못한 채, 외교 노선과 군사노선 등 노선상의 갈등 속에 분파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신규식이 지나치게 중국의 지원에만 의존하여 자주성을 훼손했다는 “사대주의자”로 비난을 받게 된 것이 신규식으로서는 가장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신규식은 워싱턴회의가 종결된 직후인 1922년 3월 20일, 국무총리 대리와 외무 총장에서 사임하였으며 그 후 임시정부는 더욱 심각한 내분에 휩싸였다. 신규식은 원래 앓고 있던 심장병과 신경쇠약이 급격하게 악화되면서 금식을 단행하였고 절망 가운데 9월 25일 순국하고 말았다. 국제적 정의와 도덕에 의존하는 외교 독립운동은 그 자체가 너무나 많은 희생과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