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임시정부의 대유럽 외교
— 글. 이장규(프랑스 파리시테대학교 박사)
20세기 초 유럽은 제국주의의 광풍과 함께 세계열강들이 패권을 다투던 각축장이었다. 특히 프랑스 파리는 전 세계 외교 무대의 중심이었다. 1919년 프랑스 베르사유에서는 1차 대전 종전 후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었다. 1차 대전 초반 내내 중립을 지키던 미국은 참전하여 연합국의 승전을 이끌었다. 그러한 가운데 1918년 미국 의회에서 선포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 원칙’은 -특히 제5항의 「모든 식민지 문제의 공평한 조치」 부분은- 전 세계 약소국가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독립운동 지사들을 한층 흥분시켰다. 결과적으로 강화회의에서 적용된 윌슨의 민족자결은 패전국 식민지에 한정한다는 것이 전제였지만 약소국가들은 자신들의 독립 문제가 회의에 상정되길 기대하며 저마다 파리로 대표단을 파견했다. 우리는 당시 임시정부가 수립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신한청년당을 급조하였고 남다른 외교 감각과 영어에 능통했던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이 대표로 선출되어 파리로 향하게 되었다.
ⓒ독립기념관
김규식
2월 1일 상하이를 출발한 김규식은 3월 중순경 파리에 도착하여 샤토당街 38번지에 한국통신국을 설치하고 즉시 공보 및 청원 활동을 시작했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정식으로 외무총장과 강화회의 전권대사로 임명된 김규식은 김탕, 이관용, 여운홍, 황기환, 조소앙 및 5명의 프랑스 현지 사무원을 보강하여 파리위원부의 진용을 갖추었다. 열악한 재정과 환경에도 불구하고 눈부신 활동을 보인 파리위원부의 활동은 첫째 공보, 둘째 연대와 후원, 셋째 청원서 제출로 요약할 수 있다.
파리위원부에게 있어서 공보 활동은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식민지 상태에 놓인 한국의 현실을 알리고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통신전通信箋(Circulaire)」을 발행하였다. 이것은 영문과 불문 매호 2,000부씩 총 23호를 발행하여 각처에 발송하였다. 이외에도 「Le Mouvement d’indépendance de la Corée et la Paix(한국의 독립과 평화)」, 「The Korean movement(한국의 독립운동)」, 「Young Korea(청년한국)」, 「La Corée libre(자유한국)」 등의 공보 책자를 각지에 배포하였다. 또한 각종 언론에 기고 또는 제보를 통해 한국의 상황을 알리는 데 주력하였다. 당시 임시정부에 보고한 『구주의 우리 사업』에 보면, 1919년부터 1920년까지 유럽 각 신문에 한국 문제가 게재된 건수가 총 181종의 신문에 517건, 프랑스는 133종 신문에 423건의 기사가 게재되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이 부분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파리위원부는 프랑스 인권연맹과 협의하여 1920년 1월 8일 생제르망의 지리학회 강당에서 “극동에서 위협받는 평화”라는 주제의 컨퍼런스를 500여 명의 청중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특히 3·1운동 당시 부산을 거쳐 산둥반도山東半島까지 여행하던 중 일본의 잔혹한 진압 현장을 직접 목도했던 펠리시앙 샬레 교수가 연설과 함께 한국의 참상을 찍은 슬라이드 필름을 상영하여 청중들로 하여금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외에도 파리위원부는 여러 국제회의에 대표들을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 문제에 대한 세계적 동정과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독립기념관
파리강화회의 임시정부 대표단(1919)
ⓒLa contemporaine
「통신전通信箋(Circulaire)」20호(1919. 9. 5.)
1919년 8월 1일에서 8월 9일까지 스위스 루체른에서 개최된 국제사회주의자 대회에는 이관용과 조소앙이 참가하여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되는 쾌거를 거두었다. 이것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결의한 최초의 사례였다.
각국의 우호적인 여론과 동정을 얻기 위한 노력으로 제국주의를 반대하며 약소국가에 관심을 가졌던 프랑스 사회당, 노동총연맹, 인권연맹 그리고 중국대표단을 비롯한 약소국가의 대표단 등의 다양한 인사들과 연대하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1919년 8월 6일 김규식이 파리를 떠나기 전 외신기자클럽에서 열렸던 그의 환송연은 그간 그의 활동상을 짐작게 할 만큼 60여 명의 프랑스 저명인사들이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과 파리위원부의 활동을 지지해 주었다. 당시 참석한 이들을 바탕으로 훗날 ‘한국친우회’가 창립되었다. 또한 여러 약소국가의 대표단, 지도자들과도 연대를 모색하였는데 그중 주목되는 것이 베트남의 호찌민이다. 프랑스 비밀경찰의 ‘호찌민 사찰 문건’에 의하면 김규식, 황기환 등의 파리위원부 인사들과 호찌민은 프랑스 사회주의자 모임에 동참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서로의 자택을 방문할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민족들의 권리연맹’의 발기인에 한국대표로서 김규식이 참가한 사실이 확인되는데 여러 약소민족들의 대표들과 연대하고자 했던 그의 간절함을 살필 수 있다.
파리위원부는 강화회의 기간 중 총 세 차례의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김규식은 파리로 출발하기 전 이미 상하이에서 신규식과 함께 작성해 한국공화독립당 총재와 사무총장 자격으로 서명한 서한을 파리 도착 이후 미국대표단을 통해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하였고, 신한청년당 대표의 서명이 된 해방을 위한 한국 국민의 호소를 담은 「비망록」은 서한과 함께 4월 5일 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이후 파리위원부에서 작성된 정식 청원서와 비망록(영문과 불문 각 10부)은 파리강화회의에 5월 10일 제출하였다. 이와 함께 윌슨 대통령, 로이드조지 수상 및 클레망소 강화회의 의장에게 각각 편지를 동봉해 공식적으로 한국 문제를 논의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청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그리고 동부전선에서 나가 함께 싸운 5,000명의 한국인을 대신하여 김규식이 제출한다고 서명하였다. 청원서는 각국 대표단과 외교단, 상·하원 및 강화회의 참석차 파리에 머물고 있던 각국 영수들 그리고 파리에 머무는 각국의 재야인사들과 각 신문사 및 파리에 주재 각국 통신원들, 각 지방 신문사와 유럽 각국의 중요 신문사에도 일일이 청원서가 전달되었다. 각처에 배포한 청원서는 영문과 불문 합계 8,000여 부에 달했다. 또한 김규식은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에도 「한국독립을 위한 지속적인 선언서와 요청서」를 황기환에게 보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것을 지시하며 독립을 위한 청원 활동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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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해
서영해徐領海(1902-?)는 프랑스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 중에 가장 오랜 기간인 25년을 체류했다. 그가 활동했던 30~40년대는 윤봉길 의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기나긴 험로를 걷던 시기였기에 유럽에서 홀로 고군분투했던 그의 외교활동은 더욱 가치가 있다.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에 참가했던 서영해는 상하이로 망명했고 임시정부의 권유로 1920년 12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파리위원부 주선으로 초·중·고등 과정을 거쳐 소르본 대학과 파리고등언론학교에서 언론학과 정치학을 공부한 서영해는 1929년 ‘고려통신사’를 설립했다. 독립된 언론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고려통신」이라는 선전 책자와『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Autour d’une vie coréenne)』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발간하며 작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작품에 나타난 극동 정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그를 극동 문제 전문가로 이름을 알리게 하였다. 이후 언론에 기고한 여러 글을 통해 한국의 실상을 널리 알리고 일제 침략의 잔학성을 규탄했다.
그는 1929년 7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개최된 제2회 반제국주의연맹 회의에 참석하여 한국 독립에 대한 굳은 신념과 세계평화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 열변으로 각국 대표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또한 1932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윤봉길 의거가 일어난 뒤 안창호가 일경에 피체되자 서영해는 즉각 프랑스 각 언론기관에 서신을 발송하고 파리 외무성을 상대로 구명운동을 펼쳤다. 비록 안창호 석방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나 같이 피체된 한인 일부가 석방되었다는 결과를 통보받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후 1933년 1월, 이승만과 함께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독립 문제를 부각시켰다. 특히 만주의 한국인 문제를 다루며 일제의 만주 침략과 만주국 수립의 부당성을 지적함으로써 「리튼보고서」 채택과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에 기여하였다.
서영해『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
1936년 3월 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외무부 주법특파위원에 임명된 서영해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과 지속적인 연락을 취하며 자신의 활동상과 유럽의 정세를 보고하였다. 그는 1936년 9월 3일부터 6일까지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제1회 만국평화대회에 참석하여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한국 민족의 자주적 평화를 주장하였다. 또한 1937년 11월 3일부터 24일까지 브뤼셀 구국공약회九國公約會에 참석한 그는 개인과 단체를 일일이 방문하여 한국 문제를 알리고 극동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중국 침략은 세계 평화에 대한 위협이다”라는 글을 통해 ‘베를린-로마-도쿄의 축’을 설명하면서 2차 세계대전을 예견하기도 했다. 프랑스 경찰국의 보고서에 보면 서영해는 스페인 내전 당시 파시즘에 저항했던 지식인들을 기리기 위한 ‘반파시스트 작가회의’에 로맹 롤랑(Romain Rolland) 등의 지식인들과 함께 참가하여 그들을 지지했다.
2차 대전 당시에는 일본의 밀고로 6개월간 투옥되기도 하였고 석방 후에는 레지스탕스들과 함께 지하활동을 하며 지냈다. 1944년 파리 해방 후, 그는 임시정부와 연락을 재개하며 자유 프랑스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해방을 맞아 귀국을 앞두고 서영해는 ‘한국친우회’ 회장을 역임했던 루이마랭에게 서신을 보내 “프랑스의 고귀한 양심으로서 한국이 가장 암울한 시기에 처해 있을 때 주저하지 않고 한국을 옹호해 준 것”에 대하여 한국을 대표해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였다. 서영해는 1920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간 이래 1945년 8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유럽 외교의 최선봉에서 활약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은 전 세계를 상대로 펼쳐졌다. 그러나 프랑스 파리는 당시 외교의 중심지이긴 하였어도 아무 연고도 없는 불모지와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인원과 열악한 여건들을 감내해가며 실로 엄청난 활동을 보여준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와 서영해의 외교활동은 가시적인 실패와 성공을 넘어서 한국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렸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