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의 자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중국 외교를 증언한 『중한외교사화中韓外交史話』
— 글. 은정태(역사디자인연구소 소장)
『중한외교사화』(석린 민필호石麟 閔弼鎬 편編, 충칭重慶,
동방출판공사東方出版公司, 1942)
민필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수립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충칭을 마지막으로 27년간 중국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중국에서 임시정부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두 도시가 상하이와 충칭이라면, 광저우廣州는 임시정부 초기의 대중국 외교 기틀을 마련한 도시이다. 임시정부는 1921년 5월 광둥廣東에서 수립된 손문孫文의 호법정부를 상대로 외교 특사 신규식申圭植(1880~1922)을 파견해 임시정부의 승인 및 지원을 요청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하였고, 이때의 논의 결과는 이후 중국 국민정부의 기본방침으로 계승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전후 외교 활동 및 상하이와 광저우에서 중국 혁명가들과의 교류를 증언하는 기록이 『중한외교사화中韓外交史話』이다. 이 책은 1942년 충칭에서 중문으로 출간된 것으로 1921년 당시 신규식을 수행하였고, 또 사적으로는 신규식의 사위이자, 임시정부의 살림을 도맡았던 독립운동가 민필호閔弼鎬(1898~1963)가 저술, 편집하였다.
당시 임시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아 5천 권을 인쇄하여 각지로 3천여 권을 보내고 중국 조야朝野로부터 찬사를 받았는데 한국혼의 정신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남은 1천여 권은 광복 후 한국으로 가져가려 했으나 폭격으로 모두 불탔다고 한다.
구성
『중한외교사화』는 크게 서문, 1~4집, 그리고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自序
第一輯 中國護法政府承認韓國臨時政府始末實記
第二輯 韓國魂
第三輯 兒目涙
第四輯 申圭植先生傳略
附錄 拙巢子序 胡政之序 潘是漢序
서문에 책을 편집, 간행하게 된 동기를 밝혔는데, 국민당의 호법정부가 임시정부를 승인한 것을 표본으로 삼아 현재(1942)의 임시정부 미승인이라는 난관을 극복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제1집은 1921년 임시정부 외무총장 신규식이 손문의 호법정부를 상대로 벌인 외교를 기행문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민필호가 집필한 것으로, 임시정부의 초기 외교정책 연구에서 많이 인용하는 저술이다. 제2집은 신규식이 1916년에 집필한 것으로 굳은 독립운동 의지를 드러내며 독립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제3집은 신규식의 한시집으로 모두 160여 수가 수록되어 있다. 제4집은 제목 그대로 신규식의 생애사인 셈이다. 부록은 2집 「한국혼」의 서문에 해당한다.
이 책을 집필, 편찬한 것은 충칭 임시정부의 외무차장으로 있던 민필호가 1940년대 초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 정부의 승인을 독촉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즉 중국의 국부인 손문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였는데 국민정부가 왜 승인을 꺼리는가를 지적하여 중국의 여론을 환기하고자 하였다. 당초 민필호가 지은 책 이름은 ‘『중한외교사화』’가 아니라 제1집의 제목인 ‘『중국호법정부승인한국임시정부시말실기中國護法政府承認韓國臨時政府始末實記』’였던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기 외교 증언
제1집은 1921년 손문의 광둥 호법정부를 상대로 신규식의 외교활동을 증언하고 있다. 당시 임시정부는 성립 후 미·영·불·중 등의 국가의 동정을 얻고 나아가 각국 정부와 접촉해 정식 승인을 얻고자 하였다. 이 중 가장 먼저 노력한 것은 중국의 승인이었다. 또 1921년 11월에 개최될 태평양회의(워싱턴회의)에서 중국의 협조를 얻어 한국 문제를 회의에 제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를 위해 신규식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을 전권특사로 파견하였고, 그는 국서를 휴대하였다. 이것은 임시정부의 첫 특사파견이었다. 이때 외무차장 대리 겸 외사국장 박찬익朴贊翊이 부사로, 민필호가 수행원으로 동행하였다. 신규식은 광둥으로 떠나기 전에 중국인들에게 한국의 독립운동을 원조해 줄 것을 요청한 ‘대한민국임시정부경고중화민국각계제군자서大韓民國臨時政府敬告中華民國各界諸君子書’를 발표하였다. 인도주의적 입장, 세계평화를 위해, 중국이 일본과의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분명하게 밝힌 국제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중국은 한국과 순치脣齒의 관계로 일본의 중국침략을 저지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제1집은 3·1운동 후 성립된 임시정부가 각국으로부터의 협조와 승인을 얻기 위한 노력이 나오게 된 배경 소개, 광둥의 호법정부와의 외교 기록, 다양한 인사들과 면담록, 동시에 광둥 및 마카오 등지의 기행기 성격을 지니고 있다. 9월 말에서 12월 중순까지 이동 중에 홍콩, 광저우, 마카오에 대한 소감을 남겼다.
10월 3일 손문을 만난 신규식은 임시정부와 호법정부의 상호 승인, 한국학생의 중국 군관 학교 수용, 차관, 독립군 양성에 필요한 조차租借 허용 등을 제시했다. 손문은 차관과 조차지 허용을 제외하고는 모두 동의했다.
신규식의 광둥 호법정부 방문과 교섭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호법정부로부터 ‘사실상’ 승인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한중관계의 기반이 마련될 수 있었다. 1922년 2월 호법정부 광둥 주재 임시정부 대표로 박찬익이 파견되었고, 1921년 9월 광둥에서의 중한협회中韓協會 결성, 이듬해 9월 상하이에서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가 결성될 수 있었다. 특히 1920년대 중반 이후 황포군관학교 등 무관학교로 학생 파견, 임시정부 외교활동 지원 등을 국민정부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었다.
손문은 호법정부 자체가 아직 광둥성이라는 한 부분만을 장악하고 있고 다른 국가의 승인을 얻지 못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신규식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렇지만 북벌계획이 완성되면 전력을 다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원조하겠다고 하였고, 그 후계자인 장개석蔣介石의 중국국민당 정부도 손문의 뜻을 받들어 나갔다. 그런데 손문을 비롯한 중국 혁명파 지도자들은 전통적 중국 중심주의 내지 중화주의적 입장에서 한국독립문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회담 과정에 열국에 의한 “시모노세키조약 불승인”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청일전쟁에서의 청조의 패전을 인상적으로 부각시키기도 하였다.
한국 멸망의 원인과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한 「한국혼」
제2부 「한국혼」은 신규식의 유작으로 민족주의를 각성시켜 독립의지를 고취시킬 목적으로 집필하였다. 「한국혼」은 1912년 동제사 설립 당시 연설했던 것을 모아 1914년에 탈고했으며, 1920년 상하이에서 창간한 『진단震壇』의 ‘통언痛言’란에 연재하였으며, 그래서 「한국혼」을 일명 「통언」이라고도 하였다. 1939년 충칭에서 중문으로 초판을 간행하였고, 1955년에는 대만에서 증보판이 간행되었다.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간행된 바 있다.
『중한외교사화』의 부록으로 있는 세 편의 서문은 모두 「한국혼」의 서문에 해당한다. 상하이에서 의사이자 문학가로 활동했던 졸소자拙巢子(1868~1937, 조영보曹颖甫), 언론인으로 『대공보大公報』 창립자 중의 하나인 항일언론인 호정지胡政之(1889~1949, 호림胡霖),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광둥에서 베트남유신회를 조직한 베트남 혁명가이자 『월남망국사』로 널리 알려진 반시한潘是漢(1867~1940, 반패주潘佩珠(Phan Bội Châu)) 등이 이들이다. 부록의 집필 시기는 모두 상이하여, 졸소자의 서문은 1916년 3월이고, 호정지의 서문은 1923년 9월, 반시한의 서문은 1923년 6월이다. 특히 호정지는 「한국혼」을 신규식의 ‘영혼 불멸한 결정체’라고 하였다.
『중한외교사화』의 제2편 「한국혼」
『중한외교사화』의 서문에 민필호는 「한국혼」을 ‘한국인에게 고하는 서書’로서 독일 피히테의 ‘독일 국민에게 고한다’, 미국의 노예해방선언이나 남송의 문천상文天祥이 원나라에 끝까지 항전하여 옥중에서 지은 ‘정기가正氣歌’와 비견된다고 하였다.
신규식은 1909년 대종교에 입교했다. 국망의 원인을 선조와 교화 및 종법宗法을 잊고, 이순신이나 거북선과 같은 선조들의 공렬功烈과 이기利器를 잊고, 국사國史를 잊고, 국치國恥를 잊은 결과로 보았다. 그래서 한국의 부흥은 단군문화와 대종교를 바탕에 두고 교육하여 한국인들의 민족정신 응집, 민족자존 회복, 민족 정체성 확립이 되어야만 가능하다고 했다. 곧 단군민족주의로서, 임시정부의 설립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단결을 호소하였다. “우리가 진실로 민족주의를 품은 채 조국광복을 핵심으로 삼아 힘써 나아가며 어려움을 피하지 않음에 이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라면 고향, 종파, 남녀노소, 가깝고 멂, 유명과 무명, 개인과 단체, 온건과 급진파, 숨어있던 드러나 있던, 농부와 장인, 상인과 선비 등 계급을 막론하고 모두 우리의 동지이다.”라고 하였다.
「한국혼」의 내용은 신규식이 관여한 박달학원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내외의 친우와 교류하며 민족의 치욕과 독립을 각성시켰던 「아목루」
제3집 「아목루兒目涙」는 신규식의 시문이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할 때부터 1922년 사망할 때까지 지은 오언과 칠언의 170여 편을 싣고 있다. 「아목루」는 신규식의 자호自號인 ‘예관睨觀’의 ‘예睨’자를 파자해 ‘어머니의 나라를 떠난 아이 눈에 흐르는 눈물’이라는 의미로 쓰여졌다. 민필호는 신규식의 문장에 대해 “선생은 문장에 능숙할 뿐만 아니라 시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는데 그의 시들은 대부분 감정이 격앙되고 비분에 넘치며 정열로 충만된 작품들이었다.”라고 평하였다.
압록강을 건너면서부터 상하이로 오기까지의 망명 과정이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거나, 생일의 감회, 홍명희, 박은식, 안창호를 비롯한 친우들, 나철 등 대종교 지도자나 손문 등 중국 혁명가들과 우정을 말하거나, 망국인으로서의 울분과 각성, 그리고 해외로 떠나가는 유학생을 격려하는 내용도 눈에 띈다. 이를 통해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을 표현했고, 또한 동시에 젊은 지사들을 독려하며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하였다. 이때 한국의 역사 유적, 이순신과 안중근을 비롯한 민족의 영웅, 대종교 등의 민족종교 등을 창작의 소재로 삼았다.
1912년부터 문학조직인 남사南社에 참여하면서 지은 시가 다수 있다. 이러한 활동은 망명 지식인과 현지 중국 혁명가들과의 정서적 유대를 만들었다. 신규식은 신해혁명의 시적 형상화, 송교인宋敎仁 등 사망한 중국인 혁명가들에 대한 애도, 군벌 및 일제의 중국 침략에 대한 규탄, 중국인들에게 조선 망국을 교훈 삼아 전철을 밟지 말라는 내용을 시로 표현했다.
이처럼 신규식의 한시에서는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망국에 대한 애통함, 일제에 대한 강한 분노와 조국광복에 대한 신념, 중국혁명에 대한 상찬賞讚과 변화 기대 등을 담고 있었다.
ⓒ독립기념관
동제사의 주요 요원, 왼쪽부터 신채호, 신석우, 신규식
신규식의 전기
제4집은 민필호가 정리한 예관 신규식에 대한 간단한 전기이다. 신규식에 대한 연구는 모두 이 글에서 출발한다. 본문에 「한국혼」 간행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충칭에서 「한국혼」을 출간한 1939년 이후에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신규식의 인품, 한말 국난과 두 차례의 자살 기도,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중국과 혁명교육 사업, 애국적 종교관과 고려사高麗寺 수축, 「한국혼」 집필 배경과 의의, 임시정부 승인 획득과 광둥 진형명陳炯明의 반란, 43세의 임종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구성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혁명교육사업, 대종교의 국교화, 「한국혼」 집필, 임시정부의 호법정부 외교 등이 비중 있게 기술되고 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신규식의 가장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하겠다. 특히 망명 직후부터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만들어 송교인, 호한민胡漢民, 요중개廖仲愷 등 중국 혁명운동가들과 교류하여 후일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과 운영에 밑돌을 놓을 수 있었다. 또 다양한 경제적 기반을 확보한 가운데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등과 동제사(1912)를 조직해 많은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또 박달학원을 개설하고는 청년들에게 군사훈련과 문화교육을 시켜 많은 청년들을 미주나 유럽, 중국 등의 대학과 군사학교에 보냈다. 또 이처럼 신규식이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전까지 상하이 망명인사들의 중심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맺음말
『중한외교사화』는 충칭 임시정부의 외사국장이었던 민필호가 임시정부의 지원을 받아 1942년 충칭 임시정부의 승인 문제를 장개석 정부에 촉구하려는 의도에서 편집, 간행하였다. 그래서 21년 전 광둥에서 신규식과 손문의 외교교섭에서 양국 정부 승인 및 중국 정부의 지원을 합의하였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간행 과정에 신규식의 유고 성격의 글들인 「한국혼」과 「아목루」가 취합되었고, 여기다 「신규식약전」이 덧붙여지면서 장인 신규식의 생애를 총괄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단행본으로 묶이게 되었다.
『중한외교사화』는 상하이와 광둥에서 신규식의 역동적인 활약만큼이나 많은 후속 자료간행과 연구들이 국내외에서 이루어졌다. 임시정부의 초기 외교교섭을 비롯하여, 신규식의 상하이 망명자들에게 대한 혁명교육과 제 단체와의 관련성, 신규식과 대종교의 관계, 신규식과 임시정부의 관계 등이 연구되었고, 망명 인사의 고뇌를 한시를 통해 분석하기도 했다. 한국과 중국의 신문자료, 일본공사관 기록, 임시정부의 공식기록 등을 참고하여 『중한외교사화』를 비판적으로 수정, 보완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중한외교사화』는 중국 남부 상하이와 광둥에서 신규식을 비롯한 해외 망명인사들이 중국혁명과 한국독립운동을 연계해 접근하려 했던 1910년대 한국독립운동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기록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 金俊燁 編, 『石麟 閔弼鎬傳』, 나남출판, 1995
· 閔石麟 編, 『中韓外交史話』, 重慶, 東方出版公司, 1942
· 石源華‧金俊燁 共編, 『申圭植‧閔弼鎬와 韓中關係』, 나남출판, 2003
· 예관신규식전집편찬위원회, 『예관 신규식 전집』, 2019
· 강영심, 「신규식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1, 1987
· 김희곤, 「신규식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활동」 『중원문화연구총서』13, 2009
· 배경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중화민국의 외교관계(1910~1945)」
『중국근현대사연구』56, 2012
· 성주현, 「남파 박찬익의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사학연구』97, 2010,
· 신운용, 「신규식의 민족운동과 대종교」 『국학연구』23, 2019
· 이금선, 「신규식 ‘한국혼’의 판본 및 번역판본의 연구」 『열상고전연구』42, 2014
· 이재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護法政府와의 외교관계 검토」
『한국독립운동사연구』52, 2015
· 진옥경, 「독립지사 신규식 한시집 아목루 연구(1)
·- 작품 계년과 해설을 중심으로」 『중국문학』108, 2021
ⓒ독립기념관
1911년 신규식의 상하이 망명 후 거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