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의 인물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독일 유학생들의 독립운동나무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수)
2024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김갑수(1894~1938)·황진남(1897~1970)·이의경(1899~1950, 이명 이미륵) 등 3명이 선정되었다. 이들의 상하이 망명 계기, 생몰, 고향 등은 각기 달랐지만, 20대 초중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련하여 활동하다가 독일로 유학길에 올랐고, 독일에서 결성된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에서 활동하며 친목을 도모하고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이들의 얘기를 시작하려 한다.
ⓒ독립기념관
김갑수
김갑수는 이상재(1850~1927)에 영향을 받은 바가 컸다. 김갑수와 이상재는 충남 한산면 종지리 출신으로 동향이다. 이상재는 1902년 ‘개혁당 사건’에 3년간 옥고를 치르면서 개신교를 받아들였고, 출옥 후 그는 1904년 종지리에 교회를 세우려 하였다. 이때 뒷집에 살던 김갑수의 부친 김영성金永聲이 교회 설립 자금을 대주는가 하면 논산의 어느 고가古家를 헐어 목재를 배로 싣고 와 교회 설립을 도왔다. 당시 김갑수 나이는 10살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김갑수는 이상재의 서울 집에서 기숙하며 경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김갑수는 1916년 3월 경성중앙청년학회 동창생 신기준申基俊·이영훈李英勳 등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南京 금릉대학에 입학하였다. 금릉대학은 중국 남부의 개신교 교파들이 연합해서 세운 대학이었다. 당시 금릉대학에는 서병호·여운형 등이 수학하고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릴 무렵 여운형 등의 주도하에 상하이에 설립된 신한청년당에 가입, 활동하였다. 신한청년당은 1919년 2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위해 회원들을 국내 각지에 파견하였다. 이때 김갑수는 군산에 파견되었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불행 중 다행으로 한국인 간수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상하이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1919년 4월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임시의정원은 임시정부의 의회로서 임시헌법상 한국 국민을 대표하는 단체였다. 의회는 도별로 뽑힌 의원과 비례대표로 구성되었다. 이 무렵 그는 임시의정원 부의장 김인전金仁全(1876~1923)의 여동생 김정신과 결혼하여 가정을 일궜다. 당시 그는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공채를 가지고 국내 잠입, 전북 임피 등지에서 모금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김갑수는 1921년 임시정부 주선으로 유학생 16명을 인솔하고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이는 당시 임시정부가 한인 청년들의 해외 유학을 장려하던 것과 1920년 3월 임시의정원에서 외국 유학생 파견을 시행 방침으로 정한 결과였다. 이에 서영해는 1920년 11월 프랑스로 유학길에 올랐고, 김갑수는 독일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그는 베를린 뷔츠부르크대학(University of Wurzburg)에 입학하여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유학 당시 그는 매우 곤궁하여 안중근 사촌 동생 안봉근安鳳根의 주선으로 수도원에서 수개월간 생활하기도 하였다. 안봉근은 외국인 신부를 따라 독일에 유학하여 전기공학을 공부한 뒤, 베를린에 정착하여 두부 공장을 경영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이때 김갑수는 유덕고려학우회를 조직하여 간사장으로서 68명의 독일 유학생을 이끌었다. 학우회는 베를린 칸트슈트라세(Kantstraße) 122번지 안봉근의 집에 사무실을 두었다.
학우회는 『회보(Heba)』 잡지를 발행하여 재독한인의 동향과 국내외 소식을 전했다. 김갑수를 비롯한 회원들은 고학생이었지만, 임시정부를 지원하며 대외 선전 활동을 펼쳤고 여러 국제대회에 참가하여 일제의 억압을 세상에 알리는가 하면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학우회는 1923년 10월 12일 일제의 관동대학살을 폭로하고자 「한인 학살」과 「동포에게 고함」 제목의 전단을 제작하여 유럽뿐 아니라 미주, 임시정부 등지에 뿌렸다.
김갑수는 1926년 학업을 마쳤지만, 임시정부가 유명무실한 상태였기에 상하이로 가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귀국 후 그는 이상재 권유로 7개월여 동안 배재학교 교감을 지내다가, 북간도로 망명하여 동흥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그곳에서 일제의 탄압을 견디지 못했던 그는 임시정부에서 같이 활동하였던 윤건중尹建重의 권유로 1927년 귀국하였다. 그는 전북 완주군 봉동에 윤건중이 설립한 봉우산업조합 이사로 참여하여 민족자본 육성과 임시정부 자금 마련에 진력하였다. 하지만 그는 불의의 부상과 과로로 얻은 늑막염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1938년 8월 15일 45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황진남은 김갑수·이의경과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았다. 그는 어릴 적 아버지 황명선을 따라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자랐다. 그는 미 감리교 선교부가 운영하던 오아후섬의 한인기숙학교(6년제)에서 수학하였고, 호놀룰루 마노아벨리 중앙태평양학교(중학 과정)를 거쳐 1916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캘리포니아대학 광물학과에 입학했다.
그가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안창호의 역할이 컸다. 그는 재학 중 1917년 3월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중앙총회(회장 안창호)에 가입하면서 안창호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남다른 애국심을 키워온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나랏일에 한 부분을 돕고자” 한다며 자퇴하고 캘리포니아 각지를 돌면서 독립운동을 위해 유세하였다.
1919년 5월경, 그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통신원으로 안창호·정인과鄭仁果와 함께 상하이로 건너왔다. 이후 그는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 안창호 비서, 임시의정원 미주 의원, 외무부 참사 등을 역임했다. 이런 중에 1920년 5월경 미국 상·하원의원이 ‘관광단’을 구성하여 필리핀·홍콩·상하이를 거쳐 8월경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때 임시정부는 선전을 통한 외교활동에 힘을 쏟았다. 안창호가 ‘미의원주비위원회’를 구성하자 황진남은 그를 도와 준비를 철저히 했고, 임시정부 대표단 일원으로 미 의원들과의 면담을 추진했다.
ⓒ독립기념관
도산 안창호와 황진남
안창호와 황진남은 1920년 7월 31일 미의원단이 상하이에 도착하기 전 방문 예정지였던 홍콩을 찾았다. 하지만 기상 악화로 미 의원단은 8월 5일 곧장 상하이로 들어갔다. 이에 안창호·황진남 등은 서둘러 상하이로 돌아왔지만, 그들이 떠난 다음 날이었다. 이후 안창호·황진남 등은 미 의원단이 도착하기 하루 전인 8월 14일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8월 16일부터 5일 동안 미 의원들을 만나 줄곧 한국이 독립할 자격이 있음을 강조하였고, 임시정부 승인 문제를 미국 정부에 요청하였다. 하지만 미 의원들의 한국 독립 원조 약속은 어디까지나 ‘구두상의 개인적 의견’에 불과했다.
황진남은 1921년 2월 임병직과 함께 상하이를 떠나 프랑스로 향했는데, 그곳 파리위원부를 방문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려 하였다. 그런데 그해 5월경 돌연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대학에 입학하여 고학으로 철학을 전공하였다. 김갑수가 독일에 유학길에 올랐던 시점과 비슷하였다. 재학 중에 황진남은 아인슈타인과 상대성이론에 관한 두 에세이를 『동아일보』에 실기도 했다. 1923년 10월 그는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많은 한인이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국에서 일본의 유혈 통치」 제목의 독일어와 영문 전단지를 제작하여 해외 한인사회와 각국 정부 및 기관에 배포하여 일제의 잔혹함을 세상에 알리며 이를 성토하였다.
졸업 후 황진남은 1925년경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소르본대학에 입학하여 수리학數理學을 전공하였고, 이때 프랑스 여성과 결혼하였다. 졸업 후에도 파리에 머물다가 1938년 9월 국내에 귀국하여 고향 함흥에서 프랑스인 부인과 함께 살았고, 1944년에는 당시 설립한 함흥의학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생활하였고, 다음 해 해방을 맞았다.
이후 황진남은 상경하여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동맹에 가입, 비서로 활동하였다. 그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외무국방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나 1948년 3월 사임하였다. 이후 그는 주한 미 대사관에서 번역과 통역을 담당하다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육군성 소속으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활동하던 중 1970년 5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이의경은 이미륵李彌勒(Mirok Li)으로 더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해주에서 상인으로 성공한 천석꾼 아버지 덕분에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해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독학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했다. 그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은 1919년 재학 중 3·1 운동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이의경
이의경 『압록강은 흐른다』
1919년 6월, 그는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에 입단했다. 청년외교단은 임시정부에 국내 상황 통보, 독립운동 자금 모집·전달, 독립 여론 조성 목적의 각종 인쇄물 작성·반포 등의 활동을 펼쳤다. 이의경은 편집부장으로서 1919년 8월 28일 국치기념일에 맞춰 『외교시보』를 인쇄해 서울과 각지에 유포해 국내·외 정세를 알렸다. 하지만 그해 11월 말 일제 경찰에 청년외교단 활동 정보가 노출되어 핵심 인물들이 체포되자, 이의경은 상하이로 망명하였고 그곳 대한적십자대에 들어가 간호사를 교육했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뮌헨 교외 그래펠핑시 ‘쿠르트 후버 거리’에 세워진 이의경 기념 동판
1920년 5월, 그는 안봉근과 요셉 빌헬름 선교사의 도움으로 독일로 건너갔다. 그는 김갑수보다 먼저 뷔르츠부르크대학에 입학하였고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모두 중퇴하고 1925년 뮌헨대학 동물학과에 편입해 졸업했다. 그는 깁갑수·황진남과 달리 졸업 후 국내로 귀국하지 않고, 1927년 10월 뮌헨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그는 재학 중 벨기에 브뤼셀 에그몽 궁전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에 참가하여 21개국 174개 단체 대표단 앞에서 일제 식민 통치의 부당함을 성토하고 한일병합조약 무효를 선언하였으며, 임시정부를 인정해 달라고 청원하였다.
ⓒ독립기념관
벨기에 브뤼셀 세계피압박민족대회가 개최되었던 에그몽 궁전 입구
이의경은 1928년 동물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이후 그는 1931년 독일 문예지 Die Dame에 최초의 단편 소설 『Nachts in einer koreanischen Gasse(어느 날 밤 골목길에서)』를 발표했다. 또한 그는 뮌헨대학 교수 쿠르트 후버와 많이 교류하였다. 그런데 후버 교수가 1943년 반나치 저항 활동을 펼치다 체포되어 단두대에서 처형당하자, 그는 당대의 가장 고귀한 사람을 잃었다며 탄식했다. 이후 후버 교수의 가족들이 연좌제와 감시에 시달리고 전시 배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자,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의 배급품을 그 가족에게 나눠주는 등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들을 돌봤다. 또한 그는 반나치 지식인들과도 교류하였고 나치를 비판하곤 했다. 이렇듯 이의경은 일제뿐 아니라 나치 독일에 저항하였던 몇 안 되는 지식인이었다.
1946년 이의경은 자서전적인 소설 『Der Yalu fließt(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책을 출판했다. 당시 이 책은 “독일어로 쓰인 가장 훌륭한 책”으로 선정되었고 독일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그는 1948년부터 뮌헨대학 동양학부에서 한국학과 동양철학을 가르치던 중 1950년 3월 20일 위암으로 타계했다.
김갑수·황진남·이의경 등은 1920년대 초 임시정부가 파견한 독일 유학생이었다. 이들은 고학하면서 베를린의 여러 대학에서 물리학·철학·의학·동물학 등을 배우며 독립한 조국의 인재가 되기를 꿈꿨다. 이들은 유덕고려학우회에서 활동하며 임시정부를 지원하거나 각종 홍보물을 제작하여 일제의 악행을 국제사회에 알리는가 하면, 여러 국제대회에 참가하여 한국 독립의 정당성·당위성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독립은 쉽게 오지 않았다. 김갑수·황진남은 고국으로 돌아왔건만, 일제 통치하에서 자신들의 포부를 맘껏 펼치지 못했다. 다만, 그들이 독일에 남겨 놓은 발자취는 오늘날에도 지워지지 않고 후세에 이어져 한국과 독일을 이어주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독립기념관
독일 베를린 유덕고려학우회가 있었던 건물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