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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생활탐색

여성 독립운동가 지복영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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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독립운동가 지복영의 삶

지복영은 나중에 한국광복군(이하 광복군) 총사령이 되는 지청천의 딸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그녀의 삶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 글. 이준식(전 독립기념관 관장)

먼저 밝혀 둘 것이 있다. 이 글을 쓰는 나는 독립운동사 연구자이지만 그 이전에 지복영의 아들이다. 어머니 영향 때문인지 일찍부터 여성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이 글은 그런 활동의 연장선에서 지복영의 삶을 소개하려는 것이다.
지복영은 나중에 한국광복군(이하 광복군) 총사령이 되는 지청천의 딸로 1919년 음력 4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던 3·1운동 직후에 독립운동가의 딸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지복영의 삶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지복영이 태어난 지 사흘 뒤에 당시 일본군 현역 장교이던 지청천은 ‘혁명의 길’을 찾아 만주로 망명했다.
아버지 없이 유년기를 보낸 지복영이 어머니 손에 이끌려 오빠·언니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 만주로 이주한 것은 우리 나이로 여섯 살 때인 1924년의 일이었다. 만주에서 어렵게 아버지를 만났지만 아버지가 독립운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기 때문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것은 어머니였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지복영의 삶에서 마지막 버팀목이 되었다.
만주의 독립운동은 한 곳에 정착해 벌이는 것이 아니었다. 독립운동의 정세가 바뀌면 독립운동가들은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아버지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아버지가 활동 근거지를 옮기면 지복영의 가족도 그에 따라 만주의 이곳저곳을 떠도는 나날이 이어졌다.
지복영은 1925년 길림성 액목현額穆縣의 검성중학교 부속 소학교에 들어갔다. 검성중학교 교장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낸 여준 선생이었다. 이 학교의 부속학교였으니 지복영이 처음 들어간 학교는 넓은 의미에서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때 만난 여준 선생은 지복영의 삶에서 사표師表가 되었다. 실제로 지복영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들릴 때면 이곳의 무후선열 사당에 위패로 모셔져 있는 여준 선생을 찾아가 꽃을 바치고는 했다.

©국가보훈부

지복영

어렸을 때부터 배움의 열망이 컸던 지복영은 아버지의 뒤를 따라 거처를 옮길 때마다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학교에 다녔지만 한 학교를 오래 다니지는 못했다. 그런 가운데 어린 지복영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1927년부터 1928년까지 다닌 길림성 오상현五常縣의 한얼소학교(?)에서 만난 한 선생님이었다. 이 학교의 교장은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지냈으며 청산리 전투에도 참전한 적이 있던 이장녕 선생이었다. 지복영이 일생의 스승으로 여긴 김창도 선생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홍범도 부대와 지청천 부대에서 활동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한얼소학교도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을 계승한 학교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복영은 나중에 김창도 선생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 신흥무관학교와 무장투쟁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었고 우리 민족의 역사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자주 회고하고는 했다.
가족보다는 나라를 되찾는 일에 몰두하는 독립운동가의 딸로서의 삶은 고난 그 자체였다. 그렇지만 지복영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민족과 나라에 대한 사랑을 내면화할 수 있었다. 주위의 애국지사들의 언행은 그 자체가 어린 소녀에게 귀감이 되었다.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세워진 학교에서 받은 초등교육도 민족의식을 키워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리 높은 민족의식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머니가 꾸려나가는 가족의 삶이 나아지는 데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았다.
다른 독립운동가의 자식들이 다 그랬듯이, 더 나아가서는 만주의 동포들이 거의 그랬듯이 제대로 먹지를 못해 지복영은 어렸을 때부터 만성적인 영양실조 상태에 놓였다. 1932년에는 장티푸스에 걸려 여덟 달 동안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의사가 장례식을 치룰 준비나 하는 게 좋겠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지복영은 생전에 자신의 체격이 아주 작은 이유가 이때의 영양실조와 중병 때문일 것이라고 이야기하고는 했다.
1933년에는 아버지를 따라 관내지역으로 이동했다. 독립운동 안팎의 정세가 바뀌는 데 따라 베이징北京, 난징南京, 호남성 창사長沙, 광동성 광저우廣州, 광서성 류저우柳州, 사천성 치장綦江 등지를 전전했다. 그런 가운데 중국 중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고 조성환, 홍진 등의 독립운동가들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았다. 만주에서도 그랬지만 이때도 독립운동가들과의 만남은 지복영의 민족의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면서도 지복영은 문학소녀의 꿈을 키워나갔고 음악을 공부하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배움의 열망이 강했다.
그러나 배움을 계속 이어가기에는 현실이 너무 어려웠다. 더욱이 독립운동가의 딸로 어렸을 때부터 민족의식을 키워오던 터였기에 개인적인 꿈은 꿈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복영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개인적인 꿈은 접고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했다.
그런 결심은 스무 살이던 1938년 광서성 유주에서 항적抗敵 선전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지복영은 이때의 일을 “총 들고 일선에 나가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가능하지 못할 때에는 후방에서라도 항전의식을 고취하고 항전방식을 중국 국민에게 널리 알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므로 선전선동공작에 뛰어들었다. 우선 남녀 젊은이들이 모여서 항전가요를 연습하고 거리에 나가 중국인들을 상대로 노래도 부르고 벽보와 전단을 만들어 담벼락에 붙이거나 행인에게 나눠주었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지복영이 한 일은 나중에 한국광복군에도 같이 참여한 오광심, 신순호, 오희영 등과 함께 일제의 침략성을 폭로하는 선전·홍보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도 독립전쟁의 최일선에서 싸워야 한다는 자각은 더 깊어졌다. 그랬기에 1939년 2월 정식으로 출범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의 대원으로 이름을 올렸고 다음 해 광복군이 출범할 때는 아예 군인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1940년 9월 17일 중국국민당 정부 임시 수도이던 충칭重慶의 가릉빈관에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을 알리는 전례식이 열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는 1919년 상하이上海에서 출범할 때부터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사정책을 마련하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실제로 군대를 편성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1937년 중일전쟁으로 중국의 상황이 격변함에 따라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원 아래 광복군을 출범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날 전례식이 끝난 뒤 참석자들은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에는 당연히 임시정부 주석 김구,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정작 눈길을 끄는 것은 따로 있다. 군복을 입은 여성 광복군 네 명 곧 지복영을 비롯해 오광심, 조순옥, 김정숙의 늠름한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독립운동에 남녀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실제로 광복군은 1941년 말에 제정된 광복군 공약 제1조를 통해 “무장적 행동으로써 적의 침탈 세력을 박멸하려는 한국 남녀는 그 주의 사상의 여하를 물론하고 광복군의 군인될 의무와 권리가 있음”이라고 밝힘으로써 광복군에 여성도 포함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한 광복군 총사령인 지청천은 “범한국혁명 남녀는 누구를 물론하고 그의 역사적 혁명을 완성하기 위하여 광복군에 참가할 권리와 의무를 똑같이 소유”하고 있다고 언명했다.

「대시대는 왔다 한국여성동지들아 활약하자」, 『광복』
지복영이 『광복』에 여성 광복군 참여를 촉구하며 기고한 글

©독립기념관

광복군 군복을 착용하고 거수례를 하는 지복영(1940년대)

©이준식

지복영이 단지 지청천의 딸이기 때문에 광복군에 입대한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여성에게 군대의 문호를 개방한 데는 여성들의 적극적인 독립 의지와 활동이 배경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당시 광복군에 입대한 여성들은 한결같이 “민족해방혁명을 완성하는 책임이 남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된 우리 두 어깨에도 무겁게 눌리어” 있다는 자각 곧 독립운동에는 남녀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따라 광복군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 바탕이 된 것은 물론 남녀평등을 지향하는 임시정부의 헌법이었다. 지복영도 “임시정부 헌법이 빈부와 신분의 귀천을 구별하지 않고 특히 남녀평등을 강조한 데 자극받아 미력이나마 일조를 하고 싶어서” 광복군에 입대했다고 회고하고는 했다.
여성의 몸으로 군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독립을 이루어야 하고 독립이 된 새로 세워질 나라는 남성과 여성이 평등해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에 남성과 똑같은 훈련을 받고 장교로 임관할 수 있었다.
지복영이 처음으로 맡은 일은 총사령부에서 기관지『광복의 편집부원으로 원고를 정리하고 번역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대시대는 왔다 한국여동지야 활약하자!」라는 제목의 글을 직접 써서 싣기도 했다. 이 글에서 지복영은 “중화의 여아들도 이중삼중의 압박을 벗어나려고 날아드는 침략자의 총알을 두려워함이 없이 가슴을 내밀고 태행산 심곡으로 황하연안으로 대륙의 동서남북을 뛰어다니며 침략자를 향하여 (피)압박자를 향하여 고함치며 싸우고 있지 않는가?…한국 이천삼백만 민족의 반수를 차지한 여성동포들은 조국을 광복하고 신국가를 건설하는 데 한 차생역군佌生力軍인 것을 범한국 사람은 다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독립운동에는 남녀가 따로 없으니 여성도 광복군에 기꺼이 입대할 것을 권유하는 선전문을 직접 쓴 것이다.
그러나『광복편집 일은 오래가지 않았다. 1941년 4월 광복군의 초모 공작 곧 장병 모집 활동에 자원하면서 중일전쟁의 최전선 지역인 안휘성 푸양阜陽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기 때문이다. 광복군은 간부 요원 중심으로 창설될 수 있었지만 일본과 맞서 독립전쟁을 치루기 위해서는 군의 규모를 확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초창기부터 일본군으로 끌려온 한인 병사에 대한 초모 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중국군과 일본군이 직접 전투를 벌이는 곳에서의 징모 활동은 언제 일본군이나 친일 중국인에 발각되어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남성도 쉽게 내켜 하지 않는 일일 수 있었다. 그런데 지복영은 어머니에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딸 하나 없었던 셈 치라는 편지를 유서 대신에 남기고 누구보다 앞서 징모활동에 자원한 것이다.
푸양에서 1년 이상 초모공작을 벌이던 중 당시로서는 불치병과도 같던 폐결핵에 걸려 1943년 5월 총사령부가 있는 충칭으로 귀환한 지복영은 신병치료와 동시에 임시정부 선전부와 외무부에 근무했다. 그리고 1944년부터는 중국 중앙방송국의 대적방송 가운데 한국어방송을 담당했다.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해방되었다. 그러나 광복을 이룬 조국에서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는 지복영의 희망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6년 5월 광복군의 국내 복원과 함께 귀국한 지복영은 국립도서관전문학교에서 만학의 길을 걷다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사서로 잠깐 일한 뒤 1963년부터는 부산의 화교중·고등학교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한글을 가르쳤다. 지금으로 치면 영관급 장교에 해당하는 광복군 전력을 뒤로 하고 평범하다면 평범한 삶을 산 것이다. 만주와 중국에서 독립을 위해 피땀을 바친 애국지사들의 삶을 기리고 젊은 세대에 전하는 것이 지복영의 마지막 낙이 되었다.
지복영은 1977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받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1991년에는 아버지인 지청천 장군의 삶을 정리한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항일무장독립운동과 백산 지청천 장군을 펴냈다. 2007년 4월 18일 세상을 떠난 뒤 2012년 5월 국가보훈처로부터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