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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터와 길

동토의 땅 시베리아에서 총살된 조선 여인 김알렉산드라의 자취를 찾아서

독립의 터와 길

동토의 땅 시베리아에서 총살된 조선 여인 김알렉산드라의 자취를 찾아서

하바롭스크는 한인 여성 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라(1885~1918)가 숨을 거둔 곳이다. 그는 연해주에서 태어난 한인 2세다.

— 글. 강지원(한국일보 기자)

4년 전 방문한 러시아 극동 최대 도시 하바롭스크는 평화로웠다. 인구는 60만 명에 불과하지만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관통하고, 아무르강黑龍江과 우수리강이 합류하는 교통의 요지여서 외부와 교류가 잦아 다양한 문화와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100여 년 전 하바롭스크는 지금과 달랐다. 러시아와 청나라의 치열한 영토 싸움이 벌어졌고, 러시아 내전으로 피비린내 나는 유혈 충돌도 있었다.
이 요동치는 역사 현장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한인들이 있었다. 하바롭스크는 연해주 일대에 정착했던 한인들이 연대해 항일 투쟁을 한 곳이다. 먼 이국 땅에서 싹텄던 독립운동의 흔적은 옅어진 지 오래지만, 독립운동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숨쉬는 듯했다.

러시아 극동 최대 도시인 하바롭스크의 아무르강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투혼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 지역을 기반으로 사회주의 항일 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 세력을 이용해 조국의 독립을 꿈꾸었다.

©강지원

김알렉산드라

한인 여성 최초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라

하바롭스크는 한인 여성 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라(1885~1918)가 숨을 거둔 곳이다. 그는 연해주에서 태어난 한인 2세다. 함경북도 경흥 천민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1869년 기근과 흉작을 피해 연해주에 정착했다. 농사와 막노동으로 생계를 잇던 그는 1891년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간선인 동청철도 공사 현장에 통역사로 강제 징집됐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김알렉산드라도 아버지를 따라 공사 현장에서 살았다. 공사에는 연해주의 한인 노동자가 대거 동원됐다. 어린 김알렉산드라의 눈에 착취당하는 한인 노동자의 모습이 생생히 새겨졌다.
1902년 아버지를 일찍 여읜 김알렉산드라는 지인의 도움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여성사범학교에 진학해 교육을 받았다. 이때 그는 본격적으로 반제국주의 사회주의에 입문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1905년 을사조약에 반발해 망명한 한인들이 많았다. 김알렉산드라는 노동자가 된 이들의 권익을 대변했고, 독립운동 투사들을 적극 도왔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러시아는 전쟁에 사용할 무기를 생산하기 위해 우랄 지역 페름(Perm) 군수공장을 가동해 전쟁 포로와 한인 등을 강제 동원했다. 당시 페름은 열악한 노동환경과 비인간적인 노동강도 등으로 생지옥에 가까웠다. 이미 만주 일대 독립운동단체들과 끈끈한 연을 맺고 있던 김알렉산드라는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통역으로 자원해 페름으로 갔다. 그곳에서 착취당하는 한인 노동자 등의 인권을 대변하는 우랄노동자동맹을 조직해 노동자들의 편에 섰다. 김알렉산드라는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수천 명의 노동자의 임금 착취 등을 고발하며 고용 해제를 요구하는 소송을 진행했다. 소송은 승리했다.
이 소송을 계기로 그는 1917년 조선인 최초로 레닌이 이끄는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가입했다. 그의 능력을 높게 평가한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그에게 극동 지역 혁명세력을 조직하는 임무를 맡겼다. 하바롭스크가 주요 거점이 됐다. 김알렉산드라는 하바롭스크 사회민주당 극동인민위원회 외교위원장을 맡았다. 인민위원회 사무실은 하바롭스크 시내 중심가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Muravyov-Amursky) 거리에 있었다. 그곳에 김알렉산드라의 집무실도 마련됐다. 그는 하바롭스크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며 이들과의 연대를 통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세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하바롭스크에는 극동인민위원회 사무실과 김알렉산드라의 집무실이 있던 건물이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건재하다. 아무르스키 22번지 3층짜리 붉은 건물이다. 1층에는 의류와 신발 등 상업 매장이 있었다. 2~3층은 사무공간으로 사용됐다. 한때 건물 외벽에 김알렉산드라 얼굴 부조상이 붙어 있었지만 철거됐다. 다만 ‘김알렉산드라가 이곳에서 일했고, 1918년 영웅적으로 죽었다’는 짤막한 문구가 적힌 안내판은 여전하다.

김알렉산드라의 집무실 건물 전경
(현재는 신발 매장으로 사용 중)

©강지원

하바롭스크, 한인 최초 사회주의 정당 ‘한인사회당’ 탄생

활동 거점을 하바롭스크로 옮긴 김알렉산드라는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한인사회당’을 탄생시켰다. 1918년 3월 이동녕, 양기탁, 이동휘, 류동열, 김립 등 독립운동 투사들과 조선혁명가대회를 열어 창당을 준비했다. 한달 뒤인 4월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이 출범했다. 임시의장에 이동휘가 선임됐고, 류동열이 군사부장, 김립이 선전부장 등을 맡았다. 이들은 조국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 한인 무장부대를 조직했다. 출판사 보문사를 운영하며, 한국 역사와 지리서 등 교과서와 기관지『자유종을 발간했다.
하지만 러시아 내전이 격화하면서 이들은 분열했다. 일본이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군을 제압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블라디보스토크에 파병하면서 전세도 불리해졌다. 하바롭스크에 모인 한인사회당 인사 중 이동휘 등은 내전에 가담하는 것을 반대했다. 하지만 김알렉산드라와 류동열 등은 일본군과 러시아 정부군(백위군)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했다. 1918년 9월 하바롭스크가 일본군과 백위군에 점령됐다. 러시아 극동인민위원회와 한인사회당은 하바롭스크를 떠나기 위해 아무르강에 모였다. 이들은 ‘바론 코르프호’를 타고 강을 거슬러 아무르주로 도피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선장의 배신으로 배는 백위군에 포위됐다. 김알렉산드라와 김립, 류동열 등 10여 명은 즉각 체포됐다. 일행은 하바롭스크로 압송돼 재판을 받았다.
백위군 장교가 김알렉산드라를 심문했다. “너는 조선인이면서 왜 러시아 내전에 참여했는가?” 김알렉산드라가 답했다. “나는 볼셰비키다. 나는 억압받는 민족과 소비에트 정권을 위해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나는 조선 인민이 러시아 인민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해야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사형이 선고됐다.
그는 1918년 9월 16일 하바롭스크 아무르강 유역 우초스 절벽에 섰다. 그는 의연했다. 눈을 가린 붕대를 벗고 그 자리에서 조선의 13도를 뜻하는 열 세 걸음을 내딛고 외쳤다.

김알렉산드라의 집무실 건물 외벽에 있는 기념팻말 (‘김알렉산드라가 이곳에서 일했고, 1918년 영웅적으로 죽었다’)

©강지원

“사랑하는 나의 동지들, 남녀노소들이여, 오늘 우리의 적들이 많은 애국자들과 친구들과 나의 삶을 빼앗아가고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 이념은 빼앗을 수 없다. 우리가 싸웠던 사업은 승리할 것이다. 내가 13보를 걸은 것은 조선이 13도였음을 의미한다. 한국의 각 도에 공산주의의 씨여! 훌륭한 꽃으로 피어라. 한국의 젊은이들이 이 꽃을 손에 들고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쟁취하라. 이 해방은 너희들의 자랑의 대상이 될 것이다. 여러분, 우리의 후배들이 조선을 다 해방시키고 사회주의가 건설되는 것을 볼지어다. 볼셰비키여! 영광스러워라.”

그의 말이 끝나자 물길이 검은 용이 꿈틀거리듯 거세다는 뜻에서 유래한 아무르강이 그를 집어삼켰다. 하바롭스크 사람들은 그를 기려 그 후로 오랫동안 이 강에서 낚시를 하지 않았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그가 조선 독립을 염원하며 총살 당한 자리에 그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그 자리엔 아무르강 풍경을 조망하는 전망대가 설치됐다. 전망대에 서서 거세고 탁한 강물을 내려다보면, 김알렉산드라의 의연했던 모습이 겹쳐진다. 동토의 땅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바쳤던 조선 여인 김알렉산드라가 순국했던 곳, 하바롭스크다.

광복 후 잊힌 사회주의 독립운동

김알렉산드라를 상실한 사회주의 독립운동은 힘을 크게 잃었다. 당 내부 노선이 갈리면서 이르쿠츠크(Irkutsk)에서 김철훈, 오하묵 등이 결성한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에서 활동한 이동휘의 ‘상하이파’로 양분됐다. 이동휘 등은 하바롭스크의 한인사회당을 이어 1921년 5월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대표회’를 열고 고려공산당을 새로 꾸렸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작성한 『고려공산당 및 전로공산당의 개황高麗共産黨及全露共産黨ノ梗槪(1923)』에 따르면 이동휘는 “독립운동의 숙원을 달성하기 위해 유력한 정보의 원조를 얻고자 볼셰비키와 손을 잡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동휘는 1921년 11월 러시아 공산당을 이끌던 레닌과 만나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기도 했다.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가 독립운동 주도권 다툼을 벌이다 1921년 6월 러시아 아무르주 ‘스보보드니(Svobodny, 자유시) 참변’이 발생했다. 이르쿠츠크파를 지원하던 러시아군이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 부대를 무장해제하는 과정에서 독립군들이 사살됐다. 이 사건 이후 내분은 더욱 커졌고, 국제 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은 중재를 통해 두 파를 통합하려고 했지만 끝내 통합에 실패했다. 코민테른은 1922년 12월 양파를 모두 해체하고 코민테른 극동부 산하에 고려국을 설치해 자신의 지휘 체계에 두었다. 조국에서 쫓겨나 국외에서 독립을 꿈꾸며 자생적으로 이뤄졌던 한인 사회주의 독립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사회주의 독립운동은 광복 이후 역사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친미 우파가 권력을 잡은 남한에서는 이념 문제로 배척됐고, 북한에서도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사가 쓰여지면서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다.
민주화 이후 정부가 역사 복원에 나서면서 조금씩 빛을 보기 시작했다. 정부는 이동휘와 김알렉산드라의 공을 기려 이들에게 각각 1995년,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 흔적이나 역사적 자료는 많지 않다. 40년간 한국 독립운동사를 연구해 온 박환 교수(수원대학교 사학과)는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와 연대해서 일제에 맞서 투쟁을 했고, 성과도 컸다”면서도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의 대한인정책의 변화로 한인 독립운동이 시베리아 현장에서 그 길을 잃고 말았다”고 평가했다.
러시아 현지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 측은 “한인사회당 위원장이자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와 여성 최초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라 등 역사에 묻힌 수많은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평가와 대중적 관심을 이끌기 위한 기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