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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여성의 정치 참여 시작, 임시정부

특집

여성의 정치 참여 시작, 임시정부

— 글. 복보경(숙명여자대학교 일본학과 강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성참정권

1919년 4월 10일 밤 10시 상하이 프랑스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에서 열린 29명의 모임은 오늘날의 국회에 해당하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설립을 결정하고, 다음날인 4월 11일 오전 10시까지 의장 이동녕의 사회로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 따라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어 행정기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헌법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통과시켰다. 총 10조로 구성된 1919년 대한민국 임시헌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제2조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

제3조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임.

제4조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누림.

제5조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유한 자는 선거권 및 피선거권이 있음.

제6조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있음.
(이하 생략)

제1조와 2조는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해 통치·운영되는 민주공화제 국가임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제3조와 5조, 6조의 3개 조에서는 여성도 남성과 같이 국민으로서 참정권과 병역의무 등의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는 남녀평등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 시작부터 여성의 정치 참여를 열어둔 것까지 고려하면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의 시작과 함께 남녀평등과 여성 참정권을 부여한 독보적인 국가라 아니 할 수 없다.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과 북미뿐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도 병역을 의무화함과 동시에 성인 남성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하며, 여성에게는 병역의 의무도, 선거권도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참정권 도입에 대한 세계적인 상황을 둘러보면 처음으로 여성의 투표권을 보장한 나라는 1893년 케이트 셰퍼드(Kate Sheppard)가 앞장선 뉴질랜드이고, 영국은 여성들의 오랜 투쟁 끝에 1918년에야 서른 살 이상의 여인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제한적인 참정권을 인정했다. 미국은 1870년에 흑인 남성에게 참정권을 줬지만, 연방정부는 1920년에야 드디어 모든 주에서의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였다. 프랑스는 시민혁명 당시인 1793년 올랭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가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하다가 단두대에서 처형됐지만, 영국과 미국의 여성운동의 영향을 받아 결국 1946년에야 법으로 보장되었다. 일본의 경우, 헌법 시행 전인 1946년 4월 10일에 이르러서야 중의원선거에서 최초로 여성의원을 선출하였으므로, 1922년에 김마리아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의원으로 선출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진성은 실로 놀랄 만하다.

©국립중앙도서관

「오백년유五百年有(여권통문)」,『황성신문』(1898.9.8.)

그렇다면 임시정부가 여성의 정치적 참여를 당시의 주요 국가보다 빠르게 수용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임시정부 수립이 3 ·1운동의 산물이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듯하다. 3·1운동은 신분과 지역, 남녀 차별 없이 일제에 맞서 독립과 이상적인 민주공화정부 수립을 선언하였고, 이때 드러난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약상은 향후의 독립운동에서 남성의 역할못지않게 여성도 큰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임시정부의 남녀평등 사상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여성인권운동에 대한 당시의 주요 기록을 살펴보면, 먼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선언문인 ‘여권통문’을 들 수 있다. 여권통문은 1898년 서울 북촌에서 ‘이소사’, ‘김소사’라는 익명으로 여성의 근대적 권리인 교육권, 직업권, 참정권을 주장한 선언문이다.
여권통문은 선언에만 그치지 않고 이후 국내최초의 여성단체(찬양회)와 한국여성에 의한 최초의 여학교(순성여학교)설립으로 이어진 실천력이 동반된 선언문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후 여성들은 항일 독립운동과 함께 남성지배적인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평등한 여성 인권 쟁취를 위한 여성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다음은 1919년 2월 만주 길림에서 발표되고, 이후 조직된 대한부인회 소속인 김인종·김숙경·김옥경·고순경·김숙원·최영자·박봉희·이정숙 등 8명의 독립의지가 강한 여성들이 1919년 4월에 서명한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주목할 만하다. 이 선언서는 곳곳에 여자의 몸으로 뜻은 있으나 국권회복운동에 행동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독립운동에서 여성의 대등한 참여를 촉구하였다. 이것은 남녀가 평등한 국민의식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으로 발전한 것이다.

©독립기념관

대한독립여자선언서(1919.4.)

또한 3·1운동에는 남자들도 주저하여 시위거사를 재빨리 수행하지 못한 지역에 여성들이 앞장서서 계획하고 수행한 곳이 적지 않다. 박용옥(2000)1 에 의하면 개성의 어윤희, 천안 아오내의 유관순, 해주 기생들의 만세시위, 여교사·여학생들에 의해 일대 만세 시위를 선도한 대구와 부산의 만세 시위운동을 비롯하여 3 ·1운동 과정에서 여성들이 보인 적극적인 참여는 민주적 평등의식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여성의 정치 참여에는 남성과 동등한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국가에 대한 의무가 동반되어야 함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녀가 평등하게 국민의 의무를 담당하여 자주국권의 회복과 새로운 민주국가를 건설하고, 남녀평등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3·1운동에서 보여준 여성들의 적극적인 투쟁은 임시정부에서의 여성의 정치적 참여를 보장하는 여성참정권의 기반이 되었고, 그것은 1919년 대한민국의 첫 헌법 이후 계속 보장받고 있다.

임시의정원 여성의원의 의정활동

1919년 4월 25일에 통과된 ‘임시의정원법’에서는 ‘의정원의원은 각 지방인민의 대표위원으로 조직함’이라는 원칙을 세우고 공식선거를 거쳐 각도 지역별 의원을 선임하도록 하였다. 의원 자격은 중등 교육을 받은 만 23세 이상의 남녀로 제한하였고, 그에 따라 선출된 임시의정원 의원들은 독립운동의 지도자급이 되는 인물로서 대부분 항일운동의 지식층 경력자들로 이루어졌다. 임시의정원 의원 선출은 당시 상황상 불가피하게 임시정부 소재지에 거주하며 해당 선거구의 원적을 가진 운동가의 선거권 대행에 의해 이루어져, 상하이 임시정부 시기(1919~1932, 이하 ‘상하이 시기’), 임시정부의 이동 시기(1932~1940, 이하 ‘이동 시기’), 충칭 임시정부 시기(1940~1945, 이하 ‘충칭 시기’)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각 시기별 특징적인 변화가 있었다.
우선 상하이 시기의 임시정부는 여성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남녀평등을 헌법으로 보장하면서도 독립군의 초급간부 양성을 목표로 설립될 무관학교의 입학자격을 남성으로 제한하는 등 그 차이를 극복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독립운동의 방법론에서도 차별을 두고 여성의 역할을 보조적인 지원에 한정시키는 한계점은 안창호가 제시한 애국부인회의 역할을 담고 있는 12개 조항(여자계 연락, 내부선전, 유족위로, 공역자 초대 등)에서도 나타난다. 실제 상하이 시기에 선출된 여성의원은 김마리아, 양한나, 최혜순의 3인이지만, 그녀들이 대의원으로서 활동한 의정활동 자료는 남겨진 것이 없고 각각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한중호조사, 상하이 한인애국부인회 등의 외곽단체에서 남성운동가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활동한 자료가 남아있는 점이 그 특징이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1930년대 말이 되자 여성 독립운동가는 이제 외곽에서의 지원활동이 아닌 직접 임시정부에 들어가 활동하거나 광복군에 입대해 일본군과 직접 맞서 싸우려는 경향이 강해지게 되었다. 1939년 이동 시기에 선출된 네 번째 여성의원인 방순희의 기록에서도 그 활동상의 변화를 찾을 수 있다. 방순희는 당시 재적의원 총 33인 중 유일한 여성의원으로서 함경도의원으로 선출되었는데 광복을 맞아 환국하기까지 7년여에 걸쳐 가장 길게 의원직을 유지하고 의정활동 기록이 가장 많은 여성의원이다. 방순희는 러시아 사정에 능통하고 러시아어가 유창하여 충칭에 있는 소련대사관을 상대로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펼쳤고, 1942년 제34차 임시의정원 회의에 출석하여 ‘광복군행동준승의 9개항 취소’를 16명의 의원과 함께 제안하였다. 또한 1943년에는 ‘임시약헌 개정안에 관한 수정안’을, 1944년에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의 시행 전까지의 조문 수정안’을 여러 차례 제안하는 등 적극적인 의정활동을 펼치며 여성의원으로서 평등한 정치적 권리를 행사한 기록이 남아있다.
충칭 시기인 1943년에 선출된 신정완, 지경희는 임시의정원 사상 최초로 한 회기에 2명의 여성의원이 동시에 선출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이로써 계속 의원직을 유지하고 있던 방순희를 포함하여 총 3인의 여성의원이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함께 의정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지경희는 1945년 8월 13일과 23일에 임시의정원 의장에게 ‘광복을 전후한 시점에 임시의정원의 권한을 장차성립될 전국 통일적 임시의회에 봉환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임시의정원의 직권을 정지해야 한다’라는 내용의 제안서를 신정완 등과 함께 연서로 제출한 기록이 남아있다. 신정완은 1943년 선출되어 1944년에는 대한민국 임시헌장 개정안과 재수정안의 제안의원으로 방순희와 함께 참여하였다. 1945년에는 지경희와 함께 상기의 제안서를 제출하는 등 광복을 맞아 본국에 환국 시까지 의원으로서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쳤다.
이상으로 임시의정원 여성의원의 시기별 고찰을 통해 국가와 민족을 위한 대의원으로서의 역할 인식이 점점 적극적인 형태로 변화해 가는 모습을 명확히 알 수 있고, 이러한 여성들의 정치 참여 의식의 변화는 지복영과 오광심 등 남성과 함께 총을 드는 여성광복군 등장의 기반이 될 수 있었다. 즉, 임시정부가 헌법으로 보장한 남녀평등 인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여성의 자아 생성 및 그에 따른 지위와 역할에 대한 인식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여성의원의 역할 또한 상징성 및 지원역할에 그치지 않고 점점 정치엘리트로서 정책반영에 적극적으로 발전해나가는 변화로 나타나고 있다.

©권기옥기념사업회

대한애국부인회 회원들의 모습(1943.2.)
| 왼쪽부터 최선화, 김현주, 김순애, 권기옥, 방순희

1_「 3·1운동에서의 여성 역할」 ,『아시아문화』 15권,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