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메뉴버튼 퀵메뉴버튼 최상단으로 가기

특집

한국 여성 독립운동가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특집

한국 여성 독립운동가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 『장강일기』를 중심으로

— 글. 윤정란(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HK교수)

한국여성독립운동사는 한국여성운동사의 특징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한국여성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898년 여성교육운동의 일환으로 조직된 찬양회부터였다. 당시 여성들은 찬양회를 조직한 날 ‘여권통문女權通文’을 선언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성과 남성은 똑같은 인간인데 그 차이를 보게 된 것은 교육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교육을 받는 일만이 남녀 동권을 갖게 되는 유일한 길이다”, “여자가 교육을 받게되면 남자처럼 사회생활을 할 수 있고 사나이가 벌어주는 것만 받아 먹는 멍에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에서는 서구와 같은 이러한 여성지위향상을 위한 운동을 지속할 수 없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정치적, 경제적 침략으로 20세기 초까지 근대산업의 발달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산업혁명 이후 공장에서의 대량생산은 많은 여성들을 필요로 하였고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불가피하였다. 여성들은 사회 참여에서 남녀 지위에 대한 불평한 상태를 자각하게 되어 여권신장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반도는 근대산업이 채 발달하기 전에 국권을 상실하는 민족적 비극을 겪게 되었다. 그러자 여성들은 남성들과 함께 구국운동에 나서야 했다.
1910년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여성들의 정치, 사회운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여성들은 3·1만세운동 이후 수많은 여성운동단체를 조직하여 정치, 사회적 의식을 향상시켜 나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이러한 여성들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임시헌장에 여성들의 권리를 명시하였다. 임시헌장 제3조에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 및 빈부의 계급 없이 일체 평등으로 함”, 제5조에 “대한민국의 인민으로서 공민의 자격 있는 자는 선거 및 피선거권을 가진다”라고 규정했다.
1920년대 여성들의 활동은 항일의열 활동으로 포문을 열었다. 국내에서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 자금과 독립운동가 가족을 돌보기 위해 항일여성단체가 조직되었으며, 조신성, 안경신 등은 항일의열 활동으로 제국의 심장을 서늘하게 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

「맹산孟山 일대一帶를 전률戰慄케 한, 여자폭탄범 조신성 등 9명, 9일 평양복심에서 공소 공판」, 『매일신보』(1922.3.11.)

©국가보훈부

조신성

김마리아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설립해서 활동하다 일경에게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 병보석으로 출감한 후 임시정부로 가서 활동하였다. 조신성은 1920년 평남 맹산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결성하고 맹산·영원·덕천 일대를 중심으로 독립사상 고취, 군자금 모집, 부일분자 응징, 관공서 파괴, 관공리 처단 등 직접 투쟁을 펴나갔다. 동년 11월 일경에게 체포되어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이러한 항일의열 활동은 일경의 방해로 계속 전개되기 어려웠다. 여성들은 제국의 통치하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을 찾았다. 그래서 차미리사를 중심으로 조선여자교육회가 조직되었고 이를 위해 전국 순회 대강연단이 만들어졌다. 이외에 경성여자청년회, 여자엡윗청년회, 기독교여자전도회, 사회주의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도 만들어졌다. 1927년에는 민족주의여성들과 사회주의여성들이 연합하여 근우회를 탄생시켜 사회 곳곳에서 신음하는 우리 여성들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근우회도 일제의 방해로 해체되어 우리 여성들은 활동 공간을 상실하였다. 이후 많은 여성들이 해외로 망명을 떠나 항일여성독립투사로서 활약하였다.
일본, 만주, 노령, 상하이, 미주 등지에서도 우리 여성들은 국내 여성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항일운동에 나섰다. 대체로 활동의 양태는 군자금 모집, 교육운동, 의열활동 등으로 나타났다. 만주로 활동의 공간을 이동한 차경신의 경우에는 1919년 대한청년단연합회 총무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주로 국내와 임시정부를 연결해주는 역할과 군자금 모집을 담당하였다.
윤희순은 1912년 환인현에서 노학당을 창립한 후 학생들에게 국어, 수학, 역사, 지리, 체조, 창가, 작문 등을 배우게 했다. 학교운영자금은 환인지역의 조선인, 중국인들에게 모금한 것으로 충당했다. 남자현, 이관린 등은 항일의열 활동의 대표적인 여성들이었다. 당시 항일의열 활동은 개인 혹은 단체 중심으로 일제 요인을 암살하거나 친일부역자를 처단하고 식민지통치기관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항일의열 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두려워 하지 않는 담력을 지녀야 했다. 남자현은 여자권학회를 조직하여 항일독립운동에 여성들의 참여를 권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분열된 독립운동 단체를 단결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관린은 남북만주 임시정부 직속기관인 광복군에서 활동하였다.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이외에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한 박차정을 들 수 있으며 해외에서 많은 여성들이 항일투쟁에 나섰다.

©국가보훈부

차경신

©독립기념관

김마리아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을 때 우리 여성들은 여자광복군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항일운동가들은 가족 단위로 항일운동에 나선 경우가 많았는데, 대표적으로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서 활동한 정현숙, 오희영, 오희옥 등을 들 수 있다. 정현숙은 어머니였으며, 오희영과 오희옥은 자매였다.
독립운동가 여성가족들은 자신이 독립운동에 나선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독립운동가의 어머니,부인, 딸로서 존재했다. 이 여성들은독립운동가인 남성을 후원해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구한말부터 개화에 뜻을 가진 남성들은 여성들의 권리를 앞장서서 주장하였다. 이들은 여성들에게 고통을 주던 제도였던 축첩, 조혼, 과부개가금지 등은 야만적인 풍속이므로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성들은 국가의 부강을 위해서는 국민의 강건이 필수조건인데 조혼을 하거나 과부의 재가를 금지하게 되면 이를 방해 한다고 보았다. 결국 여성의 권리라는 것도 구국을 위한 수단으로서 주장했던 것이다.
이들은 여성들의 권리에 대해 주장했지만 실제적으로 집안에서는 가부장적인 사고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였다. 1910년 일제에게 강점이 된 이후에도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사고방식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이들의 사상은 이처럼 어느 면에서는 매우 진보적이었으나 실제 서간도에서 독립운동가들의 행동은 전근대적인 측면도 많았다. 독립운동가 남성들은 혁명운동, 독립운동 투사로서 여성들은 적합지 않으며, 가정을 지키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고 믿었다. 여성들도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어린시절부터 유교적 여성관을 교육받고 자란 허은, 이해동, 이은숙 등은 이를 당연시 여겼다. 이은숙은 자신의 남편인 이회영에 대해 가군이라 표현하면서 “나는 가군을 대할 제 하늘같이 앙망하고 스승같이 모셨는지라”라고 하면서 서간도로 망명을떠나는 도중의 고생스러움에 대해서도 “우리나라에서는 귀가부인들이 이 같은 고생은 듣지도 못했을 것이어늘, 그러나 여필종부의 본의를 지키는 것이다.”고 하였다.

©독립기념관

아들, 손자와 함께 있는 곽낙원(1934)

©국가보훈부

남자현

허은도 서간도에서 자치 규범에 대해 당연시했다. 곧 “남의 나라에 가서도 그 나라 사람들 손가락질 안 받고 살았지.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지도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이해했다. 그는 “항일투사의 집안에 태어나 항일투사의 집으로 시집가게 된것도 다 주어진 운명이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회고하였다. 독립운동을 하는 남성들은 해방될 때까지집에 오는 날이 손가락으로 셀 정도였으므로 가정의 운영은 여성들의 몫이었다. 여성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국외로 온것도 아니며 독립운동에 참여할 의사도 없었다.
독립운동가 여성가족들은 자신들이 직접 독립운동에 나서지않는 한 남성 독립운동가들이 전쟁에 나가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면 쉴 수 있는 가정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 독립운동가 여성가족들은 가정 경제, 집안의 대소사 처리, 가족 돌보기, 독립운동가들 접대, 군자금 모집 등을 담당하였다. 남성들이 대부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집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가정 경제는 여성가족들이 담당해야 했다.
중국 상하이에서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도 임시정부의 여성가족들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을 뒷바라지했다. 곽낙원은 며느리 최준례가 세상을 떠난 후 손자들을 키우고 김구를 뒤에서 보살폈다. 당시 임시정부 가족들의 생활은 매우 빈한하였다. 그래서 그는 청년, 노인들이 굶주리는 것이 안타까워 쓰레기통을 뒤져서 배추껍데기로 찬거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독립운동가 여성가족들은 여성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일본경찰과 군대를 탐색하여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독립운동가 이병화의 부인 이해동은 시어머니와 함께 산에 가서 땔나무 구해 오기, 집안의 노인들 모시기 등의 일 이외에도 부업으로 중국 사람이 경영하는 피복 공장에서 단추구멍 만드는 일 등을 하여 가정 경제에 일조를 하였다. 이은숙도 공장에 다니기도 하고 유곽 여성들의 옷을 삯바느질, 삯빨래 등을 하면서 가정 경제를 책임졌다. 유교적인 여성관을 교육받고 자란 독립운동가 가정의 여성들은 보통 여성들보다 이중 삼중의 고통을 안고 살았다.
한국여성들은 항일운동을 통해 여성운동을 성장, 발전시켜 나갔다. 교육, 국채보상, 비밀결사, 의열활동, 광복군으로서 전쟁에 참가, 또는 항일운동가 가족으로서 항일운동을 지원하는 등 많은 활동을 벌였다. 해방 이후에는 여성법적 지위개선운동, 여성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서도 함께 투쟁하고 여성의 시민 권리를 확보해 나갔다.
한국여성들은 제국의 침탈에 두려워하지 않고 이에 맞서서 권리를 주장하였다. 이처럼 제국과의 전쟁에서 직접 저항에 나선 여성들이 있었던 반면, 한편에서는 제국의 침탈로 지독한 비극을 치러야 했던 여성들이 있었다. 가장 큰 민족적 비극이자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전 세계 여성들의 대표적인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군위안부’ 여성들이었다. 한국여성들은 군위안부 경험을 가졌던 할머니들과 연대하여 세계에 평화를 호소하면서 두 번 다시 전쟁으로 여성들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 것을 그림, 시위, 법적 투쟁 등으로 전 세계를 향하여 외쳤다. 한국 여성들은 이러한 비극을 기억하고 재현해 내면서 전 세계인들에게 평화의 중요성을 외쳤다. 그러나 오늘날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분쟁은 더욱 깊어만 가는 듯하다. 수많은 고통 속에서 제국에 저항했던 여성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그 의미를 기억하는 것은 분쟁과 갈등으로 얼룩진 남북한 문제뿐만 아니라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