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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회고록을 통해 본 여성 독립운동의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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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을 통해 본 여성 독립운동의 현황

— 글. 예지숙(숙명여자대학교 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회고록은 일반적으로 개인적 자료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현장에 생생하게 다가가게 하며, 관변, 공식 자료에서 알 수 없는 내용에 대하여 다가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특히 여성독립운동사에서 회고록은 여러 면에서 필수적인 자료로 통한다. 요사이에는 공식적인 자료의 부족을 메운다는 데서 나아가 일상적인 생활에서 어려움을 돌파하면서 변화하는 독립운동가의 일상생활에서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글은 정정화가 남긴 『장강일기』1를 소개하면서 그녀의 일대기를 살펴볼 것이다. 이 회고는 여성사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자료로 다뤄지고 있다.

명문사대부가의 딸로 태어나 망명길에 오르기까지

©독립기념관

정정화

정정화는 1900년 8월 서울의 명문사대부가에서 태어나, 11세의 어린 나이에 공조판서와 농상공부 대신을 지낸 동농 김가진의 동갑내기 아들 김의한과 혼인하였다. 선교사가 여성교육을 시작하였고 북촌의 양반부인이 여학교 설립 청원운동을 일으키는 등 세상은 변하고 있었지만, 가문혼으로 정정화는 신식교육을 받을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세상 물정에 아주 깜깜하지만은 않았다. 가내 교육을 통하여 한글, 천자문, 소학을 배웠고 남편 김의한과 친정 오빠와 그 주변의 문명개화를 아는 사람들을 통하여 국제 정세를 깨우쳤다.
정정화가 조선 최상층 명문가 출신 여성으로서 산 세월은 초년의 20년 정도였다. 망국을 슬퍼하며 칩거하던 시아버지 김가진이 아들과 1919년 10월에 상하이 망명길에 오르자 정정화는 ‘시아버지 곁에서 시중’을 들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월경을 단행하였다. 1920년 1월 초순 서울역을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너 봉천, 산해관, 천진, 남경을 거쳐 상하이로갔다. 정정화는 이 당시의 심경을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렇다 한 여인의 길이다. 열한 살에 시집 와 세상 문을 닫고 규방에 갇히고, 열아홉에 아이를 낳아 잃고 남편을 떠나보낸, 가슴 얼어 오는 그 모든 사연을 십대의 나이에 모두 치른 한 여인의 길이다. 이 길은 모진 풍파로부터 도피도 아니며, 안주도 아니다. 또 다른 비바람을 이번에는 스스로 맞기 위해 떠나는 길이다.”
(『장강일기』, 49쪽)

천신만고 끝에 임시정부에 도착한 그녀는 시아버지와 남편을 돌보며 망명 생활에 적응해갔다. 시아버지와 남편을 돌보는 것은 물론 한학, 영어, 역사 등 신학문과 고전을 두루 섭렵하였고 임시정부의 여러 인사들과 교류하며 세상에 대한 안목을 키워갔다.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온 길이었지만 정정화에게 망명은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시정부의 자금책으로 국내에 잠입한 여장부

정정화는 곧 어려운 살림살이라는 난관에 부닥치게 되었다. 3·1운동 직후에는 독립자금도 답지하고 많은 사람이 상하이로 몰려들어 한인사회의 규모도 상당했지만, 운동이 장기화되고 일제의 탄압이 가해지면서 형편이 급격히 어려워졌다. 빈궁이라는 이름의 어두움은 개인의 것이 아닌 임시정부 전반에 드리운 것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정에 앞서서 전체 민족의 생존권 획득이 우선되어야 했으므로 개개인의 구차한 살림 형편을 크게 내세우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부엌에 드나드는 아낙네의 처지는 또 달랐다. 무엇보다도 먼저 불을 지피고 물을 끊이고 명색이나마 밥상에 올릴 식량이 있어야 했다”(『장강일기』, 56쪽)

이윽고 그녀는 생계자금을 구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하였다. 처음에는 “친정에 가서 돈을 좀 얻어와 볼까.” 하는 정도였지만, 임시정부 법무총장 신규식의 지시로 인한 ‘공적인 임무’를 안고 1920년 3월 사지死地나 다름없는 국내로 잠입하였다. 잠입과 귀환은 임시정부가 구축한 연통제를 이용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르도록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품에는 국내에 들어가 접촉해야 할 사람들에게 전달할 백반물로 쓴 암호편지가 있었다.
정정화의 자금 모집을 위한 국내 잠입은 1931년까지 6차례에 걸쳐서 시도되었다. 1921년과 1922년에는 2, 3차의 잠입이 있었다. 3차 잠입 시에 안동(지금의 단동)에서 인력거를 타고 신의주로 들어오다 일경에 체포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안동에서 압록강 철교를 인력거로 건너던 중 검문에 걸려 정체가 발각되는 위기를 맞았다. 그녀는 경찰의 취조에 그냥 상하이에서 살기가 힘들어 친정으로 돌아가려 했던 길이라고 거짓말로 둘러대는 기지를 발휘하였다. 이후에도 세 차례나 더 국내외를 오갔는데, 검거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면 더 이상 국내 잠입을 시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타고난 기질과 망명 그리고 임시정부 생활에서 생겨난 자부심 등이 그녀의 뒷배가 되지 않았을까?

©독립기념관

임시정부 요인들의 피신을 도운 추푸청褚輔成 가족과 함께(1933)

임시정부의 안주인

6차례의 국내 잠입의 임무 외에도 정정화가 임시정부에서 하는 일은 많았다. 그녀는 단신의 임시정부 요인을 뒷바라지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이동녕, 이시영, 차리석, 박찬익, 조성환, 김구 선생 등 연로한 독신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을 정성껏 돌봤다. 김구 선생은 배가 출출할 때면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하면서 찾아와 끼니를 해결하였다고 한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며 임시정부를 지켜나갈 수 있었던 데는 이러한 정정화의 역할이 있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2년 윤봉길의 의거가 일어난 후 임시정부 요인들은 상하이를 떠나 항주와 절강성의 자싱嘉興으로 피신하였다. 정정화는 회고록에서 그 시기 임시정부를 ‘강물 위에 뜬 망명정부’라 불렀다. 정정화는 이시영, 이동녕, 차리석, 박찬익, 조성환 등의 요인들과 머물며 이들을 보살폈다. 장시성 우닝현江西省 武寧縣(강서성 무령현)에 있는 남편과 떨어져 살면서 김구의 연로한 어머니와 그녀의 손자를 돌보았다. 그녀는 망명지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가족을 앞세우기보다 대의를 쫓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광주, 유주, 기강을 떠돌던 피난시절에 정정화는 임시정부의 안주인 역할을 하였다. 피난길에 임시정부의 살림을 도맡았고, 홀로 지내는 국무위원들을 살뜰히 모셨다. 정정화는 1940년 3월 임시정부의 지도자 이동녕이 기강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마지막까지 간호하며 임종을 지켰다.

정치활동의 시작

정정화는 임시정부의 ‘특파원’으로 자금모집을 하거나 임정 요인을 돌보는 역할을 하였지만 공식적인 직함이나 지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임시정부에 안살림이라는 공식적 직책은 없었다. 정정화 스스로도 임시정부 내에서 정치활동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상하이 시절 여성운동가들에 대하여 “대부분이 국내에서 이화여전 등을 나온 신여성으로 그 중 몇몇은 신식교육을 받고 앞서가는 여성입네 하고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한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장강일기』, 65쪽) 그러나 충칭 시기에 이르러 정정화는 공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0년 결성된 한국독립당의 당원이 되었고, 당원과 그 가족의 생계를 보호하는 생계위원회 위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어서 정정화는 한국혁명여성동맹에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방순희(회장), 오광심(재무), 김효숙(훈련), 김정숙(선전) 등이 주요 인사였으며 정정화는 조직부장을 맡았다. 1941년에는 임시정부의 보호 아래 있는 충칭의 3·1유치원의 교사로 여성활동가와 임시정부의 2세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1943년 2월 정정화는 대한애국부인회의 재건조직에 참여하여 훈련부 주임으로 선출되었다. 이 단체는 충칭中京에서 활동하고 있던 각 당파의 여성들이 조직한 것이었다. 당시 임시정부에는 좌우통합의 흐름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이 임시의정원으로 합류하였고, 좌익진영의 무장 운동 세력인 조선의용대도 한국광복군에 편입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여성계에서 당파와 사상을 넘어 통일을 이루고자 결성한 것이 대한애국부인회였다. 충칭 임시정부 소재지에 있는 여성들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에 설립되었던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을 재건하자는 기치 아래 1943년 2월 충칭 한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다. 애국부인회의 7개 항의 강령 중 제1강령은 ‘국내외 부녀는 총단결하여 전민족해방운동 및 남자와 일률평등한 권리와 지위를 향유하는 민주주의 신공화국 건설에 적극참가하여 공동 분투하기로 함’이었는데, 민족해방과 함께 남녀 평등한 새로운 민주주의 신공화국 건설을 이룰 것을 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정정화는 남성의 보조자를 넘어 적극적인 여성 활동가로서 자리잡아 갔다.

©독립기념관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기념사진(1940.6.17.)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

해방 후 25년 만에 귀환한 정정화에게 돌아온 것은 전쟁 난민의 지위였다. 거주지가 없어 친척집에서 머물렀고 생활이 빈궁하여 김구 선생이 건네주는 생활비로 생계를 이었다. 또 잇따른 정치적인 격변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의한은 분단의 희생양이 되어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정정화도 부역죄로 5년형을 구형받고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이후 정정화는 ‘요시찰인’으로 오랫동안 감시를 받았다.

『장강일기』의 가치

정정화와 같은 여성의 역할이 없었다면 임시정부는 지속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독립운동은 조직과 노선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이 계속 삶을 이어가는 것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임시정부의 역사에서 정정화와 같은 여성이 담당했던 돌봄의 역할은 보조적이 아니라 기본적이고 근간이 되는 것이었다. 생활사, 일상사와 같은 미시사에서 정치적 격변, 전쟁에 이르기까지 거시사를 아우르는 『장강일기』는 이러한 면을 잘 보여주는 회고록이다.
또 『장강일기』에는 시아버지를 봉양하러 간 사대부 며느리의 망명길이 독립운동가의 길로 변화하는 과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는 정정화가 독립운동을 경험하면서 주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정정화의 경험은 현재와도 맞닿아 있다. 정정화의 사례는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이 갈등적 관계뿐만 아니라 때로는 협력적 관계도 가졌음을 알려준다. 남성 중심의 민족주의가 여성을 부차화하였을지라도 여성들은 역사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남녀가 평등한 민족을 만들고자 하였던 것이다.

©학민사

『장강일기』(학민사, 1998)

1_『장강일기(학민사, 1998)』는 정정화의 구술에 기초해 기록된 회고록으로, 중국에서의 망명정부 생활과 해방 이후, 6·25 이후의 인생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