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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공채 발행과 독립운동자금 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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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공채 발행과 독립운동자금 모집

— 글. 김도형(『순국 편집위원)

금전으로 싸우는 독립군

우리 독립운동은 피와 땀, 그리고 돈으로 싸웠다. 독립군들은 목숨을 걸고 일본군과 독립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독립전쟁에 참가할 수 없는 사람들은 금전으로 싸웠다. 독립군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내외 한국민들은 금전으로 싸우는 병사였다.
독립운동에는 실제로 이를 담당할 독립운동가가 있어야 하고,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는 단체와 조직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독립운동 자금을 다른 말로 ‘군자금’이라고 한다. 일제와 전쟁을 벌이는 독립군들이 사용할 자금이라서 그렇게 불렀다. 모든 독립운동 자금이 ‘독립군’의 군자금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독립군과 같은 비장한 각오로 모집되었기 때문에 ‘군자금’이라고 불렀다. 독립운동 전선에 나아가 총칼을 들고 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지원할 수 있는 자금도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우리 민족이 일제 압제에 벗어나 자유와 독립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에는 많은 자금이 필요하였다. 의병에서부터 광복군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독립운동 자금을, 국내외의 한국인들은 기꺼이 제공하였다.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이 독립국임과 자주민을 선포한 이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되면서, 정부를 운영하고 유지하려면 독립운동 자금이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임시정부와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서는 국내외 동포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다.

독립공채獨立公債
Independence Bond
1921.4.1. | 21.4×32.1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

우리 독립운동 과정에서 독립운동 자금은 매우 체계적으로 모금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인구세와 애국금을 모집하기로 하였다. 1919년 6월 15일 재무총장 최재형 명의로 징세령을 내렸는데, 징세에 대한 명칭은 ‘인구세’라고 하였다. 20세 이상 모든 한국민들은 1년에 금화 1원을 인구세로 내게 하였다. 미주에서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인구세 징수를 대행하게 되었는데, 1919년도에 미주 한인들에게 1달러의 인구세를 거두었다.
또한 임시정부에서는 항상적인 재정확보를 위해, 국내외 동포들로부터 ‘애국금’이라는 명목으로 독립의연금을 모집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1919년 5월 27일 미주지역에 애국금 3백만을 모집하라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애국금 모집을 위임하였다.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미주지역에서는 중앙총회가 미주, 멕시코에서 15만 달러 수합을 계획하고 애국금 모집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미주지역 외에 중국지역과 국내 각지에도 애국금수합위원을 임명하여 ‘애국금’을 거두게 하였다. 중국 상하이에 4명, 하얼빈과 펑텐에 각각 2명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국내에는 강원도를 제외한 평안도에 66명을 비롯하여 각도 총 126명의 애국금수합위원을 두었다. 애국금은 국내외에서 많은 자금을 거둘 수 있었지만, 가짜 수합위원 등이 발생하는 등 폐단이 있어 1920년 2월 24일자 재무총장 훈령으로 애국금수합위원제를 폐지하였다.

대한민국 공채표
Certificate of Indebtedness
1919.9.1. | 20.8×27.7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독립공채 발행을 통한 독립운동자금 모집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임시의정원에서 안정적인 재정확보를 위해 국채를 발행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1919년 7월 7일 개회된 제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내무총장 안창호는 임시정부 시정방침으로 내외국공채를 발행할 예정임을 밝혔다. 그리고 임시정부 재무부에서는 8월 1일부터 독립공채를 모집하려고 하였고, 재무부 산하에 임시공채관리국을 설치하고 8월 20일 고일청을 국장에 임명하였다. 11월 21일 법률 제3호로 국채통칙國債通則대한민국원년독립공채발행조례를 공포하였다. 독립공채조례는 총 19개 조항으로 구성되었으며, 제1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공채를 모집”한다고 하였다.
임시의정원에서 임시공채관리국관제가 제정되고, 재무부 산하에 임시공채관리국을 두고 공채발매와 상환에 대한 사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이같이 법제가 정식으로 마련된 이후 1920년 3월 3일 고일청이 임시공채관리국 국장으로 정식 취임하였다. 임시공채관리국에는 공채모집위원을 두도록 하였기 때문에, 도위원·부위원·군위원으로 두었다.
독립공채 모집위원은 공채를 소지하고 국내에 파견되어 재산가들에게 공채를 발매하였다. 국내에서 공채 발매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독립공채를 발매하다가 일제에 검거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제는 독립공채를 판매한 사람뿐만 아니라, 구매한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처벌을 하였다. 일제에 의해 국내에서 연통제와 교통국이 파괴되면서, 독립공채의 발매도 크게 위축되었다. 1921년 후반부터 공채 모집은 침체되고 국내에서 공채 발매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공채는 임시공채관리국의 법제가 마련된 이후인 1920년 3월 10일 이후 발행되었다. 현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 소장된 독립공채 증권은 가로 32.1cm 세로 21.4cm로 A4 용지 보다 약간 크다. 공채 증권의 발행일은 1921년 4월 1일이고, 액면가 50원이다. 증권의 중앙에는 독립문이 그려져 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의 서명과 총장의 인장이 찍혀있다. 아래쪽에는 독립공채 발행의 법률적 근거로,「국채통칙」제1조와「공채발행조례」제1조를 들고 있다. 증권의 오른편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원년 독립공채 이자표가 1~30까지 기재되어 있다.

구미위원부에서 발행한 공채표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공채를 발행하였지만, 미국 워싱턴의 구미위원부에서도 임시정부 재무총장의 위탁으로 공채표를 발행하였다. 3·1운동 발발 소식이 전해진 후 이승만은 국채(공채)를 발행하여 미주지역 동포와 외국인에게 자금을 모집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워싱턴에서 1919년 8월 1일 대한민주국 집정관총재와 재무부총장 대판차장 김규식 명의로 500달러, 50달러, 10달러 ‘대한민주국 공채표’를 발행하였다. 그러나 이 공채표는 실제로 발매되지 못하고, 다시 회수되었다. 왜냐하면 이승만은 8월 25일 대한민국 특파주차구미위원부(약칭 ‘구미위원부’)를 정식으로 설립하고 외교와 재정을 담당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구미위원부에서는 미주지역에서 공채표를 발매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임시정부에서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애국금 모집을 위임하였다. 이승만은 중앙총회의 애국금 모집을 중지시키고, ‘공채표’로 통일시키고자 하였다. 이렇게 해서 미주에서는 이른바 ‘애국금-공채표’ 논란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구미위원부와 중앙총회의 애국금-공채표 논쟁은 1920년 3월 23일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이, “각하의 시의를 의하야 재무부에서 위원부에게 재무관을 위탁하오니 각하의 지휘하에서 행하게 하시오.(Jaimuboo entrusts Jaimukwan to commission as you requested. Act at your direction.)”라고 하여 구미위원부에 전보를 보냈다. 임시정부 재무총장의 전보로 미주에서 애국금 모집은 중지되고, 구미위원부가 발행하는 공채표로 독립운동 자금이 모집되었다. 이시영의 전보 이후 구미위원부에서는, 주차구미위원부 공포서, 공채조례, 지방위원조례 등을 공포하여 공채표 발매를 하게 되었다.
구미위원부에서는 1919년 9월 1일자로 대한민국 집정관총재와 특파주차구미위원부 위원장 명의로 5달러, 10달러, 15달러, 25달러, 50달러, 100달러, 500달러, 1,000달러 8종류의 공채표를 발행하였다. 공채표에 기재된 바와 같이, 대한민국 정부가 독립이 되고, 미국 정부로 승인을 받은 1년 후 대한민국 정부 재무부총장은 미국 금화와 같은 가격으로 보상해 준다고 약속하였다. 공채표의 이자는 매년 4%로 하고, 보상을 할 때까지는 매년 6%로 한다고 하였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 소장된 구미위원부 공채표는 액면가 50달러로 발행번호는 369번이다. 공채표의 앞면은 영문으로, 뒷면은 한글과 한문으로 작성되었다. 구미위원부에서는 공채를 모집하기 위해 각지에서 ‘공채모집위원회’가 설립되어, 공채모집원이 공채금을 수합하여 구미위원부 장재掌財에게 보냈다.
이승만은 1919년 6월부터 하와이에는 애국금 대신에 공채금을 모집하게 하였다. 북미와 달리 하와이에서는 일찍부터 공채금을 거두게 하였다. 아직 공채표가 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채금 영수증을 우선 발행하였고, 구미위원부에서 제작한 공채표는 나중에 주었다. 하와이에서는 공채금을 우선 수합하고, 영수증을 발행하였던 것이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는 하와이에서 공채금을 납부하고, 제공자에게 발급한 가로 14.9cm, 세로 12.2cm 크기의 ‘대한민국자유공채금영수증’이 소장되어 있다. ‘대한민국자유공채금영수증’은 원래 1919년에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서 제작되었으나, 공채표가 제작된 이후에도 여전히 사용하였다. 이 영수증은 구미위원부 하와이지방 도시찰 이종관의 이름으로, 1920년 12월 2일 공채금으로 50달러를 납부한 ‘호항’ 즉 ‘호놀룰루’의 전영택에게 발급된 것이다.

대한민국 자유공채금 영수증
Receipt for Independence Bond
1920.12.2. | 12.2×14.9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되던 1919년 4월 11일부터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되던 1945년 8월 15일까지 임시정부는 하루도 쉬지 않고 우리 민족을 대표하고 또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존재해 왔다. 임시정부가 이같이 오랜 기간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국내외에서 임시정부를 받들고 옹호해 왔던 한국민들의 금전적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임시정부는 독립공채를 발매하여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1921년 후반에는 사실상 모집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는 국외로부터 거두어들이는 독립운동 자금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미주지역은 임시정부에 제공되는 독립운동 자금의 가장 중요한 제공지였다. 3·1운동 이후 미주의 한인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수십만 달러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으며, 대부분의 자금은 임시정부에 제공되었다. 임시정부는 미주 한인들이 제공한 독립운동 자금으로 그 명맥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12월 29일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공채 상환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1984년부터 독립공채에 대한 상환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