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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에서 온 소식

여학생의 애국정신, 한국에 머물렀던 서양 여선교사의 담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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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의 애국정신, 한국에 머물렀던 서양 여선교사의 담談

이 자료는 1919년 해외에서 3·1운동 관련 소식이 어떻게 유통되었는 지 그 정보망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자료는 독립사상을 갖춘 자주적 근대 한국 여성이 법정에서 탄생했음을 증언한다.

— 글. 옥성득(UCLA 한국기독교석좌교수)

자료의 중요성: 여학생의 법정 투쟁

3·1운동에 관해서는 1919년 3~4월 시위가 집중된 시기에 관한 연구가 많다. 그러나 1919년 5월 이후 수감자의 ‘법정 투쟁’은 연구가 적다. 일본인 판사와 검사 앞에서 독립의 당위성과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천명한 논리와 감옥에서의 만행과 고문을 폭로한 행동도 운동사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국가기록원이 편찬한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3·1운동편)』(2016)는 해제에서 54명의 여자 수감자를 분석하면서, 여학생은 1920년 3·1운동 1주년 때 시위에 참여한 배화학교 여학생 24명을 포함한 26명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웹페이지를 검색해 보면, 유관순(18세) 외에도 김경순(서울 정신여학교, 18세)이 1919년 8월 4일 판결을 받았고, 1921년 3월과 12월에 목포 정명여학교 천귀례(18세)와 곽희주(16세) 등 10명이 6~10개월 징역형을 받았다.1 모두 기독교 여학교의 학생이었다. 국가기록원이 정리한 수많은 판결문에는 오늘 소개하는 청년독립단 기록은 없다. 이 자료에 등장하는 여학생들이 징역형을 받았다면, 3·1운동 관련으로 1921년 말까지 6~10개월 징역형을 받은 10대 여학생은 40명이 넘는다. 곧 유관순 외 여러 여학생의 법정 투쟁도 3·1운동 역사의 일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자료의 내용

자료는 대담자 선교사의 서론, 여학생 1의 법정 답변, 여학생 2의 법정 답변, 결론, 출처 등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긴 부분은 여학생 1과 판사의 심문과 답변이다. 여학생은 합병의 불법성, 동화정책의 불가능성, 독립의 당위성,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세 가지 이유를 말했다. 본문의 소제목은 필자가 달았다. 원문에서 글자 위에 점을 달아 강조했으나, 밑줄로 대신한다.

서론: 여학생들이 투옥되고 학대로 신체상 불구가 된 자도 많다. 그러나 독립사상은 극도에 달했고 백절불굴의 의지로 비록 죽어도 독립국의 자유인이 되겠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금일 운동이 외국 선교사의 사주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나 추호도 근거가 없다. 전 세계 어느 국민이나 독립과 자유를 원한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는 일본인의 간계에 불과하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여러 여학생과 접촉하였는데 그들은 사랑스럽고 영문으로 논문을 작성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은 맨손으로 “한국 독립 만세” 한 번 불렀다는 죄로 이들을 투옥하고 형언치 못할 악행과 모욕을 가했다. 옷을 발가벗기고 태형을 가하고 종일 천정에 매달아 놓고 죽침을 놓았다.

일본 관리[검사]의 문초와 여학생 1의 답변:
일: 너는 언제부터 독립사상을 품었어?
여: 독립사상은 늘 있었지요.
일: 너는 어찌하여 여자로서 남자들과 같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어?
여: 세계 어떤 일이 남녀의 협력 없이 된 일이 있소? 즐거운 가정을 이루려면 우선 부부의 협력이 있어야 하지 않소? 이같이 국가를 건설하는데도 남녀의 협력이 없어서는 아니 되지요.
일: 왜 독립을 하겠다 해? 이유는 무엇이야?
여: 저는 한국 사람이니까요.
일: 그러나 너는 교육을 받은 자니까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겠지. 이유가 무엇이야?
여: 다 아니 말하겠습니다.
일: 너 합병을 어떻게 생각해? 총독부 정치에 대하여 감상이 무엇이야?
여: 합병 아니 되었으면 좋을 뻔하였지요. 총독부 정치에 대한 감상 말이요? 당신들은 우리에게 차별적 대우를 하여 왔지요. 우리를 동화시키려고 하였지요. 일본말을 강제로 시켰지요. 우리 말과 우리 역사를 엄금하였지요. 당신들은 우리를 독일이 자기의 식민지에서 행한 것과 같이 꼭 그 모양으로 우리를 대우했지요.
일관: 그러면 이유는 그뿐이야? 독립을 희망하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이야?
여: 이유는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한국의 행복을 위함이요, 둘째는 일본의 행복을 위함이요, 셋째는 세계의 평화를 위함입니다.
일: 어디 다 설명해 보아라.
여: (제1) 한국은 일본과 역사도 다르고 언어, 풍속, 습관이 전혀 다르지요. 그러므로 동화라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지요. 그뿐만 아니라 합병으로 말하면 이는 우리 황상께서도 원하시지 아니한 것이요, 또한 우리 인민들도 희망치 아니한 것이지요. 전 우리 황상께서 합병 조약에 조인하신 것으로 말하면 전혀 당신들이 무력으로 위협하여 받은 것이지요. 과거 10년간 우리 동포들이 얼마나 합병 정치에 저항했는지 당신들은 다 잘 아시지요. 과거 10년간 우리 동포가 얼마나 많이 생명을 빼앗기고 얼마나 많이 고통을 받고 얼마나 많이 핍박을 받아왔는지 당신들은 잘 아시겠지요. 한인으로 독립을 희망치 않는 자 어디 있겠습니까. 남녀노유를 무론 하고 당신들이 잘 신용하는 한인 정탐까지라도 진정한 고백을 하라 하여 보시오. 내심에는 다 독립을 원한다 하지 아니하리오.
(제2) 우리가 독립을 바라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를 위하여 뿐 아니라 일본을 위하여서도 역시 이것이 옳지요. 우리나라 사람들도 국민성이 있으므로 당신들이 아무리 동화를 시키려고 애써도 안되지요. 밤낮 반동만 일어날 것이지요. 우리는 결코 일본제국의 충량한 신민은 되지 아니해요. 그러므로 당신들에게는 항상 염려거리가 되지요.
(제3)은 이렇게 두 나라 사람들이 밤낮 투쟁만 일삼고 보면 동양에는 어느 때나 평화 올 때가 없지요. 만일 동양이 평화를 못 얻고 보면 전 세계는 밤낮 불온한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므로 세계 평화를 위하여서도 역시 한국의 독립이 필요하지요.
일: 나는 선지자가 아니므로 글쎄 독립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다.
여: 당신들이 우리를 합병한 것은 당신들의 이익만 위하여 한 것일까요?
일: 아, 그것이야 2국의 인민을 위하여 한 것이지.
여: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비록 우리는 당신들의 정치하에서 많은 이익을 받았다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우리가 다스려 가려고 해요. 또한 일본으로 말하여도 그렇지요. 만일 일본인 한국을 합병함으로 인하여 이익을 득하였다면 정의와 인도를 위하여서는 이같은 이익은 희생하여도 무방하지요. 나는 한국이 비록 적고 아무 가치가 없는 나라라 하더라도 한국의 자녀는 될지언정 결코 일본제국의 신민은 되지 아니하여요.

여학생 2의 문초와 답변:
또 어떤 여자 하나는 “너 어떻게 독립사상을 품게 되었나”하는 일관의 엄문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한다.
일: 너 누가 독립사상을 넣어주었어? 선생이 시키더냐? 그렇지 않으면 서양 사람들이 시키더냐?
여: 시키기는 누가 시켜요. 누구를 어린아이로 아십니다. 닭이 누가 시켜서 새벽 때가 되면 울고 하나요? 독립할 때가 되었으므로 저절로 독립 만세 소리가 나왔지요.
일관: 그러면 왜 독립을 요구해? 독립할 필요는 무엇이야?
여: 그것이야 각 국민의 권리이므로 독립을 요구하지요.
결론: 한국은 부활하였도다. 또한 이 한국 부흥 운동에 표현된 여자의 용감한 기개는 참 누구나 보는 자 탄복의 성을 발치 아니할 이 없으리로다. “자유, 그렇지 않으면 사” 이것이 현금 한국 여자계의 표어다.

출처: 이 보도는 대륙보에 양일 연속하여 대서특필로 게재된 것이며, 또한 중국 각 신문에도 연차 역재된 것이나, 단 지면이 허락지 아니하므로 말미암아 이에 간단히 초역하기로 하였나이다. (역자)

「여학생의 애국정신」, 『독립신문』 제29호(1919.11.20.)

©독립기념관

자료의 배경: 같은 날짜『신한민보』기사

자료 끝에 번역자가 언급하는 출처인 『대륙보』는 1916년 오하이오 컨티넨탈 시에서 창간된 주간지 『The Continental News-Review』인 듯하다. 오하이오에는 1884년 알렌 의사 내한 이후 지한파 인사들이 많았다. 1903~1912년 서울 보구녀관 간호부로 근무하고 동대문 지역을 선교했던 구타펠(Minerva L. Guthapfel) 양이 오하이오에서 멀지 않은 시카고 근처 에반스톤에서 1919년 한국의 독립운동을 선전하고 있었다. 구타펠은 7월부터 샌프란시스코 국민회(회장 백일규)의 지원을 받으며, 정한경과 이승만 등과 함께 1919년 10월 시카고에서 한인 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를 조직했고, 선교사들로부터 한국 사정을 듣고 미국 정계와 언론계에 이를 알렸다. 아마도 구타펠이 미국에 온 여자 선교사로부터 재판 관련 정보를 듣고 이를 『The Continental News-Review』에 제공하여 11월 초에 기사가 실렸고, 이를 중국 신문(아마도 독립운동 기사를 꾸준히 보도한 Shanghai Gazette 등)이 소개하면서, 『독립신문』이 번역해서 보도했을 것이다.
『독립신문』 기사는 같은 날(1919.11.20.)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신한민보』의 「감옥 속에셔도 독립을 주쟝: 고초와 사망을 도라보지 안코」 기사와 비슷하다. 『신한민보』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면 관계로 일부 생략하며 [] 부분은 활자가 흐려 짐작해서 넣었다.

삼일운동으로 … 감옥에 있던 1,200명 독립운동자 중에 37인이 여성이었다. … 10월 10일 오전 9시부터 서울 지방재판소에서 청년독립단 공개재판이 열렸다.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 시위운동에 참여한 학생 2백명(여학생 5명)에 대한 재판이었다. [에다나카] 판사가 주재하고 [야마사와] 검사가 학생들을 문초했다. 학생들은 기상이 격앙하여 일본 정부의 불법성을 공격하였다. 판사는 “너희들이 그래도 너희 죄를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만한 고생을 해서는 정이 다스려지지 않은 모양이다.”하고 하자, 학생들은 “우리는 우리 조선국의 독립을 위함이요, 우리가 고생을 하던지 죽던지 우리나라를 위하여 희생코자 함이니, 우리는 이를 다만 영광으로 아노라.”라고 대답했다. … 방청하던 수십 명의 선교사들은 학생들의 백절불요의 기상과 명확한 논리로 검사와 판사의 말에 대답하는 것과 적법적 태도와 공손한 언사를 지키는 태도에 놀랐고 감탄했다.

여기서 오늘 자료의 배경이 1919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 만세 시위에 참여한 200명의 청년독립단에 대한 10월 10일의 경성지방법원 재판이었으며, 당시 서대문형무소 수감자 1,200명 중 37인이 여성이었고, 청년독립단 200명 중 5명이 여학생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 자료는 3월 1일 첫 시위부터 남녀 학생들은 확고한 독립관과 투철한 애국심으로 만세 시위에 참여했으며, 7개월 이상 수감 생활에도 불구하고 신념과 용기가 흔들리지 않았고, 법정에서 명확한 논리, 지혜로운 태도, 백절불굴의 기상을 드러내었음을 보여준다. 여성의 3·1운동에서 개신교 여학교와 선교사의 역할도 중요하다. 그들은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감옥 방문, 편지와 기고문과 대담으로 본국 신문에 일본의 비인도적 만행과 한국 여성의 애국심을 알려서, 독립운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나아가 이 자료는 1919년 해외에서 3·1운동 관련 소식이 어떻게 유통되었는지 그 정보망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자료는 독립사상을 갖춘 자주적 근대 한국 여성이 법정에서 탄생했음을 증언한다. 만세 운동에 참여하고 법정에서 투쟁한 기독교 여학생들은 새벽닭처럼 새 시대의 여명을 알린 전령이요, 한국 부활의 상징이었다.

1_국가기록원,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Main.do) 이 10대 소녀들 외에 20대 초반의 여성으로는 임봉선(23세, 대구 신명여학교)이 1919년 4월 18일 징역 1년, 김영순(25세, 정신여학교)과 장선희(24세, 정신여학교)가 1920년 12월 27일 징역 2년 형 판결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