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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인물들

하와이 한인 여성단체와 독립운동

임시정부의 인물들

하와이 한인 여성단체와 독립운동

1900년 초 수재가 계속되어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대한제국 한국인들은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자원해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

— 글. 김성은(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대한독립선언서(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 1919)

©독립기념관

1900년 초 수재가 계속되어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대한제국 한국인들은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자원해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 1903년 1월 호놀룰루 항에 한국인 첫 이민선이 도착했다. 이후 수많은 한국인 이민노동자들과 ‘사진신부’가 하와이에 도착했다. 하와이 사진신부는 경상도 출신이 가장 많았다. 대부분이 가난하고 문맹이었지만, 이민 여성 가운데는 교회에서 성경 공부를 하면서 한글을 읽고 쓰는 이들도 있었다. 이민 여성들은 남편과 함께 맞벌이 노동을 했고, 교회에 다니면서 여러 조직 활동에 참여했다. 여성들의 경제력과 조직 활동 경험은 이후 여성단체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다

1909년 이전부터 미국 이주 한국인들은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으며, 1909년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국민회를 조직하고 교육과 실업 발전에 힘썼다.
1909년 하와이 ‘신명부인회’에서 공동의연금 모금 활동에 참여했다. 1909년 말에는 하와이에서 안중근 의사 재판 경비 모금이 시작되었다. 오하우섬 신명부인회, 콜로아 신명부인회 회원들이 모금 활동에 참여했다.
1909년에는 부인들이 자유교회에 모여 ‘부인교육회’를 조직했다. 부인의 교육을 목적으로 신학(성경)과 가정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부인교육회 설립 목적에는 ‘하나님 앞에 남녀평등’을 위해 여자교육이 중요한 문제라고 설파했다. 순정효황후 윤비도 여자교육을 장려했듯이 한국의 여권을 확장하고 여자사회의 혁명에 여자교육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하와이 한인사회에게 “한국의 국권을 광복”하는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이로 보아 하와이에서 여성교육운동은 국권회복과 구국운동의 관점에서 강조되었다. 부인교육회 역시 안중근 의사 재판 경비로 10달러를 기부했다.
하와이에서 한국인들의 거점은 호놀룰루였다. 1913년 호놀룰루에서 신명부인회, 부인교육회 외 두 단체가 통합해 ‘대한부인회’를 결성했다. 황마리아(강마리아)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대한부인회의 목적은 자녀의 한글교육 장려, 일본제품 배척, 교회와 사회단체 후원, 재난동포 구제였다. 실업을 경영해 재정을 만들었는데, 이 점이 회비로만 운영되는 모임과는 다른 특징이었다.
1910년 한일병합으로 나라가 완전히 망하고 난 뒤이고 아직은 3·1운동 전이었기에, 활동은 구제활동 위주였다. 대표적으로 1914년 서간도 재난동포구제금 300달러를 노블선교사를 통해 보냈고, 하와이 국민회와 『국민보』를 지원했다.

승리 역군 배지(대한부인구제회, 1900년대)

©독립기념관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 장정(1919)

©독립기념관

대한부인구제회 재정 장부 사본(1931)

©독립기념관

3‧1만세시위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와 후원

하와이 한인 여학생들은 국내에서 일어난 3·1운동 소식을 듣고 1919년 5월 ‘대한소녀리그’를 조직했다. 고등학교 여학생들의 단체였다. 회장 최순이, 서기 신메리였다. 전 세계 각지의 여성단체들, 파리평화회의 미국 대표들, 윌슨 대통령 부인에게 수백 통의 편지를 보내 한국의 독립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1919년 3월 15일, 3·1운동 소식을 접한 하와이 각 지방 여성대표들이 호놀룰루 국민회 총회관에 모였다. 이날 모임에는 하와이 각 지역의 여성대표 41명과 한인 300여 명이 참석했다. 하와이 한인교포사회, 특히 국민회의 관심과 격려가 컸음을 의미한다.
3월 29일, 하와이 여성대표들은 ‘제2차 대회의 결의안’을 발표했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조국독립운동 후원의 목적으로 하와이 각 지방의 한국부녀를 규합하고 부녀사회의 운동역량을 집중한다. 둘째,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독립전쟁이 일어날 경우 출정군인 구호를 위해 적십자 훈련을 하며 재난 동포 구제에 노력한다. 셋째, 조국독립운동과 외교 선전에 대한 후원을 대한민국국민회 지도에 따라서 진행한다. 마침내 4월 1일 “조국독립운동에 총역량”을 기울이기 위해 ‘대한부인구제회’가 결성되었고 손마리아가 회장을 맡았다.
1919년 11월 ‘하와이 대한부인회 장정’이 제정되었다. 여기에는 하와이 한인여성들이 대한부인구제회를 조직한 동기가 국내 기미년 독립운동 소식을 듣고 “우리 여자들도 하늘이 준 국민 고유의 의무와 권리를 다함이 천직인 줄 자각”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여성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의무라는 인식이 나타나있다. 각 지방에서 선출된 대표들로 대표회가 구성되었다. 특이한 점은 대표 자격으로 22세 이상 “국한문을 능히 쓰고 읽을 줄 알며, 국문과 영어만 쓰고 읽을 줄 알아도 합당하다.”고 명시했고, 대표가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에는 권고사직이나 파면을 하도록 규정했다. 지도자의 역량과 함께 책임문제까지도 명시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대한부인구제회의 첫 사업은 ‘대한독립선언서’ 컬러 포스터 3,000장을 인쇄해 판매하는 일이었다. 포스터에는 독립선언서 전문, 33인 민족대표 이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각료 명단,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언문, 정강이 실렸다. 포스터의 가장 위에는 태극기와 무궁화가 선명하고 아름다운 컬러로 장식되어 있었다. 1장에 20달러를 받고 팔았으며, 판매 수익금이 2천 달러였다. 여기에 300달러를 보태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800달러, 3·1운동 중 사상을 당한 국내 애국지사 가족들에게 1,500달러를 보냈다.
재정은 회원으로부터 회비 2달러 50센트를 매년 받아서 경상비로 쓰고, 사업 경비는 특별의연금으로 충당했다. 주요 활동은 독립운동자금 지원과 구제 사업이었다. 대한부인구제회는 기금을 모금하여 만주에 있던 대한군정서, 대한독립군 총사령부에 출정군인 구호금을 보냈다.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 대한광복군이 편성되었을 때도 후원금을 보냈다. 또한 국내에 재난이 있을 때마다 YMCA,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통해 구제금을 보냈다.

해외한족대회 대표들과 대한부인구제회 회원들(1941.5.1.)

©독립기념관

영남부인회와
대한부인구제회의 분열

1928년 이승만의 발언에 분개한 영남(경상도) 출신 여성들이 영남부인회를 결성했다. 이희경(이금례, 권희경), 박금우는 영남부인회, 대한부인구제회, 하와이 국민회,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1930년 말 하와이 호놀룰루 대한부인구제회는 국민회 계열과 동지회 계열로 분열되었다. 부인들 간에 분열이나 문제는 없었지만, 하와이 독립운동단체인 국민회와 동지회 사이에 충돌과 분열에 휩쓸려 나뉘게 되었다는 것이 두 부인단체 회원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이들은 같은 이름 아래 각자 활동을 이어갔다. 분열 후에도 같은 이름으로 활동을 이어갔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1937년 합동 노력이 있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1949년 국민회 계열 대한부인구제회는 ‘대한인국민부인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동지회 계열 대한부인구제회는 1961년까지 ‘대한부인구제회’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대한부인구제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적극적인 참여와 지원

두 대한부인구제회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기금 모금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떡, 김치, 대구무침, 무말랭이 무침을 만들어 팔고, 달걀을 팔았다. 행상을 나설 정도로 판매에 열성적이었다. 1937년에는 연극공연을 해서 표를 팔아 기금을 모금했다. 1942년에는 ‘한인 휘장(Korean Badge)’을 주문해 판매했다. 한·미 양 국기를 교차시켜 “미국 승리에 한국도 같이 한다”는 문구를 넣은 승리 기원 배지였다. 태평양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승리를 기원하는 동시에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는 의미였다.

해외한족대회 결의안(1941.4.27.)

©독립기념관

1930년대 후반부터 미주지역 한인사회의 힘을 하나로 모아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40년 호놀룰루에서 ‘연합한인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중한민중동맹단·독립단·동지회·국민회·국민회 계열 대한부인구제회·동지회 계열 대한부인구제회가 대표를 파견했다. 국민회 계열 대한부인구제회 대표는 곽명숙·김차순·김매들린·심영신이었다. 동지회 계열 대한부인구제회 대표는 김순연·김노듸(손노듸)·이유실·정순이였다.
1941년 4월 재미한인들은 하와이 호놀룰루에 모여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를 개최하고 ‘결의안’을 발표했다. 북미 대한인국민회·하와이 국민회·대한인동지회·중한민중동맹단·대조선독립단·한국독립당·하와이총지부·조선의용대·미주후원회연합회·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대한여자애국단 등 미주한인사회의 주요 단체들이 참석했다. 대한부인구제회에서는 국민회 계열의 심영신, 동지회 계열의 민함나가 참석했다. 해외한족대회에서는 독립전선의 통일, 임시정부 봉대, 대미 외교기관 설치, 미 국방공작 원조, 재정방침,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의사부(호놀룰루에 위치)와 집행부(로스앤젤레스에 위치)로 나뉘어 위원제로 운영되었다. 의사부는 총 11명의 의사위원으로 구성되었고, 심영신, 민함나가 위원으로 활동했다. 1942년 2월 의사부는 ‘독립금 수봉위원회’를 조직해 독립운동 자금 모금을 시작했다. 심영신, 민함나는 의사부 의사위원이자 독립금 수봉위원으로 선임되어 독립금 모금 예약을 담당했다. 하와이 한인교포사회에서 이루어진 채권 구입, 구호금, 의연금 수금은 대부분 여성 수금원(징수위원)들이 담당했는데, 이들의 손 때 묻은 카드가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1944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는 대한부인구제회의 김공도가 재무(부장)로, 안정송(이정송)이 위원으로 활동했다. 1945년 3월 연합부인구제회가 조직되었다. 회장 민함나, 부회장 심영신이었다. 이들은 함께 힘을 모아 국내 동포들에게 구호물품을 보내며 지원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1945년 해방 후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건국 도상에 있는 국내 동포와 고락을 함께 하자는 성의로 조국에 대표 파견을 결의”하고 미주 본토에서 5명, 하와이에서 9명의 대표를 선출했다. 대한부인구제회에서는 안정송과 박금우가 대표로 활동했다.
미주 하와이 한인사회의 한국독립운동에는 여성단체의 재정적 기여와 활동이 큰 몫을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