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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품

한국의 독립운동을 유럽에 알리다!
『한국의 독립과 평화』, 『어느 한국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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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립운동을 유럽에 알리다!
『한국의 독립과 평화』, 『어느 한국인의 삶』

─ 글. 최두진(부산대학교 교육학과 연구교수)

파리위원부 ‘한국 정보국’

제1차 세계대전 후, 승전국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를 개최하기로 하였고, 이에 미국에 있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는 1918년 10월 1일 회의를 소집하여 강화회의에 파견할 한국 대표로 김규식金奎植을 선출하였다. 김규식은 1919년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하였고, 4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총장으로 임명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주파리위원부 위원으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1921년까지 파리위원부는 한국 정보국(Bureau de Information Coréenne)을 설치 및 운영하여, 『자유 한국(La Corée Libre)』·『한국의 독립과 평화(L’Indépendance de la Coreé et la Paix)』 등을 영어나 프랑스어로 발행하여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한국 정보국에서는 한반도의 문제와 일본의 만행, 특히 3˛1독립운동을 알리기 위해 『한국의 독립과 평화』를 1919년에 간행하였다. 이 책은 「국가와 국민」, 「한국과 일본」, 「일본 지배하의 한국」, 「한민족의 독립운동」, 「조선에서 자행된 일제 만행」, 「일본제국의 대륙 정책」, 「부록」으로 구성되었고 그 구체적인 근거를 들고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의 독립과 평화』

「국가와 국민」-한국의 지리, 역사, 문화와 더불어 근대에 체결한 일본을 비롯한 서국 열강과의 수호통상조약을 독립된 국가로 체결하였다는 것.
「한국과 일본」-한국과 일본의 관계사에서 한국은 일본에 문화를 전파한 데 반하여 일본은 지속적인 침략을 자행하였고, 결국엔 일방적으로 병합조약을 체결하였다는 것.

「일본 지배하의 한국」-병합 후 법률, 교육, 노동에서 한국인은 일본인에게 차별을 받았다는 것.
「한민족의 독립운동」-한국의 독립운동이 평화적, 비폭력적, 민주적 저항이며 이러한 가운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되었다는 것.
「조선에서 자행된 일제 만행」-독립운동에 대해 일본은 폭력적이고 무차별적인 만행을 저지르고 있으며 심지어 외국인인 선교사들에게도 악행을 행하고 있다는 것.
「일본제국의 대륙 정책」-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대륙도 차지하려는 야욕을 가졌다는 것.
「부록」-‘대한독립 선언문’을 비롯하여 근대적 조약이 ‘한국’이라는 독립된 국가에 의해 체결되었다는 것.

이처럼 파리위원부에서는 단순히 폭력적인 만행만을 알리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전세계에 한국의 역사, 문화, 지리 등을 정확하게 알리고, 당시 만행되고 있었던 일본의 폭력과 탄압을 폭로함으로써, 각국으로부터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얻고 독립을 위한 지원을 받고자 하였던 것이다.
파리 강화회의를 통한 외교의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지만, 중요한 것은 김규식을 비롯한 파리위원부의 활동을 계기로 한국독립 문제를 국제문제로 부각시켰고, 한국 정보국의 출판활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국제사회에 대응했다는 것이다. 강화회의 이후, 파리위원부는 파리를 비롯한 유럽 주요 도시에서 한국 문제에 관한 강연회를 개최하였고, 국제회의에 참가하여 한국독립의 지원에 대해 적극적으로 유럽인들에게 호소하였다.

『한국의 독립과 평화(L’Indepéndance de la Corée et la Paix)』
1919년 |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 세로 27.5 × 가로 18.8

1921년까지 파리위원부는 한국 정보국(Bureau de Information Coréenne)을 설치 및 운영하여, 「자유 한국(La CoréeLibre)」· 「한국의 독립과 평화(L’Indépendance de la Corée et la Paix)」 등을 영어나 프랑스어로 발행하여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에 한국 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어느 한국인의 삶(Autour d’une Vie Coréenne)』
1929년 |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 세로 18.5 × 가로 12.2

서영해, 프랑스를 무대로 삼다

서영해(1902~1956?, 부산 초량 출생)는 3·1운동 이후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였다. 한약방을 운영하였던 아버지 덕택으로 서당교육과 근대교육까지 받았다. 이후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여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자 같은 해 4월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1년 넘게 머물다가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이때 상하이에 머물면서 이름을 서희수徐羲洙 에서 서영해徐嶺海 로 바꾸었고, 중국 국적의 여권으로 프랑스에 가게 되었다. 서영해가 프랑스를 선택하게 된 것은, “프랑스가 사상이 깊으면서 간결하고 또한 넓으므로 동양의 현실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당시 파리가 국제외교의 중심지였으며, 따라서 당연히 프랑스어가 국제외교 무대의 공용어였기 때문이다.

서영해 사진 (1933.3)

©부산박물관

독립의 밑거름이 된 프랑스 교육과정 이수

1920년 11월 6일 프랑스로 출발하여 같은 해 12월 13일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 도착하였고, 1921년 12월 보베의 ‘리세(lycée)’ 에 입학하여 프랑스 정규 교육 과정을 밟았다. 11년간의 초등, 중등 정규교육과정을 6년 만에 마쳤다. 11년 중 10년은 ‘리세’에서 공부하였고, 마지막 1년은 샤르트르의 ‘마르소고등중학교(Lycée Marceau)’에서 공부하였다. 마르소에서 고등과정을 졸업하고서는 파리 ‘소르본대학(Sorbonne Université)’ 철학과 진급시험에 합격하여 고등교육을 받게 되었으나 교육받는 도중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정기적으로 받던 유학자금을 마련할 수 없게 되어 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1927년에는 로렌지방의 ‘롱위(Longwy)’ 도시에서 노동허가증을 발급받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포도농장, 식당 등을 전전하였다. 1928년 4월에 파리에 있는 세계최초 언론학교인 ‘고등사회연구학교(École des Hautes-Études Sociales)’에 입학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고등사회연구학교에서는 저널리즘과 관련한 법지식과 사회, 정치, 경제와 관련된 저널 교육을 받았고, 실습도 병행하였다.

본격적인 독립운동과 저술활동

1929년 제2회 반제국주의 세계대회에 참석을 시작으로, 서영해는 독립운동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9월 28일 파리 시내에 있는 자신의 숙소에 ‘고려통신사(Agence Korea)’를 설립하여 일제의 만행을 알렸다. 프랑스 대통령에게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고 무력을 행사한 것에 대해 항의를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고려통신사는 서영해를 중심으로 유지·운영되었고, 그는 통신원으로서 활동하면서 한국을 알리기 위한 저서도 발간하였다.
그 첫 번째로, 역사소설인 『어느 한국인의 삶』을 1929년에 발간하였는데, 당시 이 책은 프랑스에서 상당히 이슈가 되었다.

3부로 이루어진 이 책은 박선초라는 이름을 빌려 서영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1부에서는 한국의 역사와 한일합방 직전까지의 한국의 불안한 정세에 대해서, 2부에서는 고향 영산에 대한 회상, 3부에서는 3·1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게 된 경위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3부 내용 가운데 「독립선언서(Déclaration d’Indépendance la République de Corée)」 전문을 실었는데, 당시 세계 대공황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정가 15프랑의 책으로 1년 만에 5판이 인쇄되었다는 사실은 프랑스와 유럽 사회에 한국을 다시 알리는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프랑스 일간지인 『르 쁘띠 주르날(Le Petit Journal)』에도 ‘서영해는 고통받는 민족의 아픈 역사를 인상 깊게 서술하였다’고 하였다. ‘국제 자유·평화 옹호 여성단체(Women’s International League for Peace. & Freedom)’에서는 이 소설을 통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국제정치 문제로 바라보고 국제여론에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국제 자유·평화 옹호 여성단체의 회원국은 미국, 영국, 독일, 캐나다를 비롯한 총 27개국이었고(일본도 포함됨), 준회원국으로 중국, 인도, 아르헨티나 등 21개국이었기 때문에, 다수의 국가에서 이 단체의 회원들은 당시 한국의 현실을 알리는 데 크게 작용하였다.
이 소설 속 주인공은 박선초인데, 서영해를 대변하는 소설 속 인물이기도 하지만 조선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표현된 것으로볼 수도 있다. 그를 인도주의자, 정의, 영원한 자유로 표현하고 있듯이, 서영해는 당시 직면한 현실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지향해야 할 가치로 인도, 정의, 자유를 표방하였던 것이다.
이어서 1933년에는 『만주의 한국인들』이라는 저서를 발간하였고, 1934년에는 『거울, 불행의 원인』을 고려통신사를 통해 간행하였다. 이 저서들은 한국 문화를 프랑스에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자전적 소설인 『어느 한국인의 삶』은 한국의 역사와 당시 일제의 억압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고, 『만주의 한국인들: 이승만 박사의 논평과 함께 리튼 보고서 발췌』는 부제에서도 나타나듯이 이승만이 국제연맹에 제출한 한국문제에 관한 보고서로서 유럽사회에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거울, 불행의 원인』은 한국민담집으로 「흥부와 놀부」, 「심청전」, 「토끼전」 등 35개 주제로 한국의 문화 민속을 소개한 것이었다. 이 외에도 1920~1940년대 사이에 『샌프란시스코 행 선상에서(On board to San Francisco)』, 『내가 살고 싶은 곳은 바로 그곳이다(That’s Where I Want to Live)』, 『구두 장수의 딸(A Daughter of Shoe Seller)』을 통해 한국의 문화를 지속적으로 소개하고자 하였다.

고려통신사와 주 프랑스 특파원

‘고려통신사’는 임시정부에서 전달한 독립운동과 관련한 중요 자료를 해외에 전파하는 중요한 기관이었다. 1932년 도쿄 의거 전 이봉창 의사 기념사진과 훙커우 공원 의거 전 윤봉길 의사 기념사진, 1938년 백범 김구가 중국 후난성 湖南省 에서 열린 회의 도중 밀정이 쏜 총탄을 맞고 병원에서 치료한 사진도 고려통신사로 전달되었고, 관련된 기사가 프랑스 언론을 통해 전파되었다.
1934년 4월에는 임시정부 주 프랑스 외무위원으로 선임이 되었고, 1936년 3월 임시정부 주 프랑스 특파위원으로 선임되어 더욱 조직이 갖추어진 임시정부의 주요직을 맡게 되었다. 1937년 9월에는 벨기에 브뤼셀 구국공약회九國公約會 에 참석하여 태평양 문제에 대하여 강연을 하였고, 임시정부에서 전해온 선전 자료를 번역하여 프랑스 언론에 배부하였다. 1940년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당과 파로 나뉘어 독립운동을 훼손하지 말고 힘을 모아 독립에 힘을 기울일 것을 호소문으로 작성하여 발송하였다. 1940년 6월 14일 독일 나치에 의해 파리가 점령되었고, 서영해는 프랑스를 위해 3여 년간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10월 15일 조소앙에게 보낸 편지를 끝으로 서영해와 임시정부와의 편지가 끊기고, 임시정부 주 프랑스 특파원으로의 역할을 더 이상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치에 체포돼 6개월간 감금 생활을 하기도 하였지만, 석방 이후에도 레지스탕스 저항 운동을 이어갔다.
그는 이렇게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다가 1945년에는 임시정부 주 프랑스 대표로 선임되었다. 서영해는 광복을 맞이하자마자 8월 16일 『Ce soir』에 ‘한국은 일본제국주의의 최초의 희생자였다.’라는 글을 게재하여 ‘힘든 상황 속에서 독립운동의 결과로 자유와 독립을 얻었고, 도와준 프랑스에 대해 감사하고, 정의, 자유, 사랑의 대한민국이 될 것이다.’라는 글을 남기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교육활동에 힘쓰다가 1948년 다시 중국을 통해 프랑스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