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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의 삶

특집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의 삶

─ 글. 황선익(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교수)

망명으로 시작된 ‘임시정부 대가족’의 삶

중국 지역은 한국 독립운동의 교두보였다. 일본 제국주의와 직접 맞서 싸우고, 국제사회에서 한국 독립의 당위성과 역량을 알리는 데 있어 중국 지역은 전략적 중심지였다. 1900년대 들어 간도를 비롯한 중국 관내지역으로 한인들의 이주, 왕래가 늘어나는 가운데 1910년대 한인들은 베이징北京, 칭다오靑島, 상하이上海 등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래 임시정부의 소재지는 한인 사회의 거점이 되었다. 1932년까지 상하이가, 1939년부터 충칭重慶과 인근 지역인 치장綦江 등지가 한인 사회의 거점이 된 것은 임시정부를 매개로 한인사회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망명으로 시작된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차츰 가족 단위로 확장되었으며, 나아가 ‘임시정부 대가족’이라는 운명공동체로 발전되어 갔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현실적으로 중국 내 이방인이었기에 여러 제약을 감수해야 했다. 특히 일본의 식민 지배로 국외 왕래가 자유롭지 않았다. 유럽에서 활동한 서영해나, 미주를 왕래한 안창호의 경우 현실적 문제로 중국 국적을 취득해야만 했다. 이들 외에도 많은 이들이 국외 왕래와 자녀 교육 문제 등으로 인해 중국 국적을 취득하거나 거류증을 발급받아야만 했다. 국내에서 전도유망한 이들이었다 해도 중국에서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소수자요, 이방인이었다.
임시정부의 중견 간부로 활동한 청년들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기도 했다. 프랑스 공무국에서 일하던 엄항섭은 임시정부의 운영뿐 아니라 특히 석오 이동녕이나 백범 김구처럼 특정한 수입이 없는 원로들을 지원하였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엄항섭 군은 프랑스 공무국에서 받는 월급으로 석오나 나 같은 궁한 운동자를 먹여살렸다.”고 하였다. 엄항섭 외에도중국 정부에서 일하던 민필호나, 전차 검표원으로 일하던 청년등 많은 이들이 사실상 임시정부 요인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임시정부 가족들은 일가 친척이 모여 살곤 했다. 안중근의 형제 사촌인 안공근·안정근·안봉근 등은 조마리아 여사 및 자손 십여 명과 일가를 이루었고, 신규식·신건식 형제는 중국에서 대를 이어 독립운동 일가를 이루었다. 이 외에도 김태연·김붕준·박찬익·김의한 등이 새로이 가족을 이루고 자손을 낳아 임시정부 대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임시정부 요인 가족들은 이롱주택에 세 들어 거주하곤 했으며, 독신 인사의 경우 여기에 더부살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독신 남성 요인이 많은 탓에 임시정부 가족 중 여성들은 이들의 끼니와 빨래 등을 챙겨야 했다.
‘임시정부 대가족’에게 가장 큰 고난의 시기는 상하이를 떠나며 시작된 이동기였다. 일제의 중국 침략으로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1940년 충칭에 정착할 때까지 진장鎭江, 난징南京, 항저우杭州,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치장으로 긴 유랑생활을 했다. 일제의 공격을 피해 임시정부를 계속 옮겨야 했던 것이다. 이들의 이동거리는 5,000킬로미터에 달했다. 이동은 중국 정부가 제공한 기차나 자동차 또는 배를 이용했는데, 임시정부 요인의 가족 100여 명이 함께 이동했다. 이동 중에는 일본군 비행기의 공습과 폭격으로 급하게 피신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장기간의선중 생활은 단조로웠다. 중국 선원들이 밥을 해줬지만, 반찬은각자 해결해야 했다. 된장, 고추장 같은 짠 반찬을 해서 밥을 먹는것이 보통이었다. 배가 잠시 정박하기만 하면 육지로 올라가서반찬거리가 될 만한 것을 구해 오는 게 일이었다.
중국의 전시수도이자, 임시정부의 소재지였던 충칭은 한인 동포 300~400명 가운데 70~80명이 사망할 정도로 날씨와 기후도 나빴고, 영양 상태나 주거 환경 또한 좋지 못했다. 이동기 내내 겪던 공습경보와 대피는 충칭에서도 이어졌다. 일본군의 폭격과 장거리 이동, 악독한 기후와 생계의 곤란을 이겨내며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모두가 하나되는 ‘임시정부 대가족’으로 거듭났다.
임시정부 가족들은 일제의 대륙 침략을 온몸으로 체감하면서도, 자신들의 민족정체성을 고수하고자 노력하였다. 비록 중국 학교에 다니더라도 집에서는 늘 한국어를 구사했으며, 학생들이 모두 모여 줄지어 등하교하곤 했다. 이방인이지만 하대 받을 수 없다는 오기와 자부심이 아이들에게도 전해졌던 것이다. “나라잃은 민족이 아닌 나라를 되찾을 민족”으로서의 긍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충칭 우리 마을에서 동암 차리석 선생 회갑기념(1941.9.23.)

©독립기념관

함께 기념하며, 연대하는 독립정신

독립운동가들이 특히 중시한 것은 역사의식이었다. 그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과정과 대한제국의 멸망, 이에 맞선 순국선열의 투쟁을 잊지 않기 위해 부단히 기억하고 기념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 전계국을 두어 독립투쟁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했으며, 한일관계사료집 편찬 등을 통해 ‘임시정부 현대사’를 역사화하기도 했다. 임시정부에게 있어 기념의 대상은 을사늑약과 경술국치일과 같은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날도 있었지만, 잊어서도 안 되는 3·1절과 건국기원절(개천절), 그리고 임시정부수립일 등도 있었다.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망명 생활 중에도 민족의 명절과 기념일을 되도록 기리고자 노력하였다.
1920년 3월 1일 제1회 3·1운동 기념일에는 한인 동포 집집마다 태극기가 내걸렸으며, 임시정부 인사 및 교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올림픽극장에서 3·1절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임시정부의 국경일이 된 3·1절은 한인 동포들의 축제일이기도 했다. 해마다 3월 1일이 되면 한인들은 기념식과 강연회 등을 개최하는 한편, 연예회를 열기도 했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창사에서 임시정부대가족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함께 모여 연극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들에게 3·1절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독립에의 염원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의식이기도 했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음력 10월 3일을 단군의 탄신일, 즉 개천절 혹은 건국기원절로 기념했다. 이들에게 건국기원절은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확인하고 교민들의 우의를 다지는 기회였고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는 날이기도 했다. 또한 새해 원단에도 축하식을 개최했으며, 음력 5월 5일 단오절에는 임시정부 가족들이 소고기와 수육을 준비해 함께 식사하며 단오절 명절을 기렸다. 임시정부 가족들은 중국 땅에서 좋은 일과 어려운 일을 함께 하고, 음식을 나누고 서로 도우며 힘든 망명 생활을 버텼다. “객지에서의 낯선 생활에서 그래도 서로에게 힘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동지들”이라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압박과 밀정의 감시가 언제든 계속되던 중국에서 임시정부 가족들의 기념 활동은 독립운동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창사에서 제19주년 3·1절 유흥조 전체연원 기념(1938.3.1)

©독립기념관

국외 지역 곳곳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기념 활동이 이어졌지만, 중국 거주 한인 동포들은 독립운동에 대한 기념에 누구보다 열심이고 공적이었다. 주로 민단이 주최하고 정부 인사들이 참여하는 기념일은 3·1절, 임시정부 수립일, 국치기념일 등과 같은 역사적인 날과 안중근·이봉창·윤봉길 등을 비롯한 순국선열에 대한 기념일과 민족정체성을 상징하는 개천절 등이었다. 이들의 기념활동은 단순히 교민들의 우호 활동에 그치지 않고 임시정부의 공식 행사로 여겨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삶은 망명으로 시작해, 시간이 지나며 가족 단위로, 또 다른 가정을 일구며 확장되어 갔다. 이들은 중국에서 망명자이자 이방인으로 살아가며 많은 제약을 받았고, 한편으로 생계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세대를 이어간 청년 독립운동가들이었다. 새로운 인연과 가족을 일구며 ‘임시정부 대가족’으로 일가를 이룬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운명공동체가 되었다. 충칭시기 임시정부가 일시적으로 생계부를 둘 만큼 교민들의 생활과 생존은 임시정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기도 했다. 일상과 의례, 삶과 죽음을 함께 한 임시정부 가족들의 연대 의식은 광복 후에도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의식은 임시정부의 역사를 정립하고 지켜가는 버팀목이 되었다. 이 모두 독립을 위한 생존 투쟁, 긴 시간 함께 한 일상日常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