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의 인물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부부의 인연을 맺어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부터 1945년 8월 해방될 때까지 가장 오랫동안 존속했던 독립운동단체이다. 임시정부는 한때 존폐 위기도 있었지만, 작은 불씨일지라도 대한국인 모두에게 독립의 희망을 주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불나방처럼 그곳을 찾아 기꺼이 힘을 보탰다. 공훈록에 실린 임시정부 운동계열 인사만 하더라도 395명의 실명이 검색된다. 임시정부 산하의 직속 군대인 광복군까지 포함하면 974명으로 3·1운동, 국내 항일, 의병, 만주 방면 다음으로 수가 많다.
그런데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특징 중 하나를 꼽으라면 가족 단위로 망명하여 활동하였다는 점이다. 1910~1920년대에는 남편이 먼저 중국으로 망명하고 적당한 때에 부인이 어린 자녀들을 이끌고 뒤따라 독립운동에 동참하였다. 자녀들이 성장한 뒤에는 임시정부 내에서 활동하거나 집안끼리 혼인하여 부부 독립운동가가 되기도 하고, 독립운동가 자제들이 임시정부 혹은 광복군으로 활동하던 청년과 부부의 인연을 맺기도 하였다. 임시정부 내에서 새롭게 부부의 인연을 맺은 경우에 한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대략 20여 쌍으로 확인된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출범한 뒤 비교적 이른 시기에 부부 독립운동가가 되었고, 또 그들 자녀가 성장하여 광복군이나 임시정부에 활동하던 중 결혼하여 2~3대에 걸쳐 부부 독립운동가가 탄생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1920년 5월 결혼한 민필호(1898년생)와 신규식의 딸신명호(1906년생)의 경우이다. 대한제국군 출신의 신규식이 1911년 상하이로 망명하였는데, 당시 신명호는 6살이었고 남동생 신상호(1912년생)는 배 속에 있었다. 신명호는 1919년 9월 모친 조정완, 동생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왔다. 이듬해 신규식은 자신 밑에서 일하던 민필호를 사위로 맞았다. 민필호는 휘문의숙을 졸업한 뒤 1911년에 상하이로 유학하여 1912년부터 신규식이 조직한 동제사에 가담하면서 인연을 맺기 시작하였다. 둘 사이에 민영수(1921년생)·민영주(1923년생)·민영애(1927년생)·민영백(1942년생) 등 4남매를 낳았다.
그중에 민영주는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 비서로 근무하던 중 부관으로 있던 학병 출신 김준엽을 만나 결혼하였다. 이로써 3대에 걸쳐 부부 독립운동가가 탄생하였다.
조소앙의 7남매 중에서 막내인 조시원(1904~1982)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결혼하였다. 그는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한 뒤 조소앙이 유럽에서, 용주·용한 형들이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1920년 2월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는 상하이 남방대학 역사사회학과에서 수학하였는데, 같은 대학에 재학 중이던 이순승(1902~1994)을 만나 1922년경 결혼하여 부부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둘 사이에서 1923년 9월 조순옥이 태어났는데, 그는 성장하여 광복군 제2지대에서 활동하다가 1945년경 안춘생(1912년생)과 결혼하여 대를 이은 부부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1940년 충칭에서 김구의 장남 김인(1918년생)과 안춘생과 육촌 사이인 안미생(1914년생)이 결혼하였다. 안미생은 안중근의 동생인 안정근(1885~1949)의 큰딸로 베이징에서 출생한 이후 연해주에서 자랐고 1919년 늦가을 상하이로 이주하였다. 이후 그는 베이징의 칭화대학에 진학하였고 중일전쟁 이후 충칭 주재 영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 김인과 결혼하였다. 안정근이 1939년 이후 갑작스레 병을 얻어 행방이 묘연하던 때였다. 안미생은 1945년 3월 남편이 사망하자 시아버지 김구의 비서관으로 활동하였다.
오영선(1886년생)과 임시정부 초대 총리를 지낸 이동휘의 차녀 이의순(1895년생)도 1920년 상하이에서 결혼하였지만, 앞선 경우와는 달랐다. 오영선은 대한제국군 출신으로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이동휘와 함께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1920년 2월 임시의정원에서 선출되었으며, 그해 9월에는 국무원 비서장으로 국무총리 이동휘를 보좌하였다. 이 무렵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이의순이 할아버지 이발(1851~1928)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와 오영선과 결혼한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영선은 1939년 3월에 병사하였고, 이의순은 1945년 5월에 사망했다. 둘 사이에 3명의 자식이 있었지만, 오도영(2006년, 상하이에서 작고)을 제외하고는 생사를 알 수 없다.
두 번째는 국내에서 태어난 뒤, 모친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 뒤 성장하여 임시정부 혹은 광복군에서 활동하던 청장년들과 결혼하여 부부 독립운동가가 된 경우이다. 먼저 신규식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한 동생 신건식(1889~1963)은 박찬익의 아들 박영준(1915년생)을 사위로 맞았다. 신건식은 망명 당시 오건해(1894~1963)와 결혼한 상태였는데, 정보수집과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를 오가는 사이에 큰딸 신순호(1922년생)가 태어났다. 부인은 1926년경 딸을 데리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 뒤 1943년 12월 신순호는 광복군으로 활동하던 중 광복군총사령부 서무과장 박영준과 결혼하였다. 결혼식은 충칭 오사야항 임시정부 강당에서 치러졌는데, 사회는 외무부장 조소앙, 주례는 주석 김구, 민필호·조완구·김원봉·김성숙 등이 축사하였다. 이날 박찬익은 “가정을 가져서 다섯이나 되는 자식을 두었지만, 자식 놈의 결혼식에 참석해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고 또 마지막이 됩니다.”라고 하여 장내를 숙연케 하였다.
김붕준(1888~1950)은 부인 노영재와 김덕목(1913년생)·김효숙(1915년생)·김정숙(1916년생) 등 3남매를 국내에 두고 홀로 3·1운동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이후 1921년 8월 부인은 자녀들을 데리고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러서 김덕목은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직후 체포되었지만, 김효숙·김정숙은 모친과 함께 부친이 머물고 있던 광둥성으로 피신하였고 두 딸은 중산대학에 입학했다. 이때 김효숙은 재학 중에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같은 대학에 다니던 송면수(1910년생)를 만나 결혼하였다. 둘은 광복군에서 활동하는 부부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김정숙 역시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는데, 1942년 4월 교통부 비서, 1943년 의정원 비서로 근무하던 중 김구의 중매로 고시복(1911년생)과 결혼했다. 당시 고시복은 임시정부 군무부원 및 내무부 총무과장을 맡고 있던 때였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서로군정서 중대장 오광선(1896~1967)은 1922년경 고국에 남겨놓은 부인 정현숙이 만주로 찾아와 재회하였고 이후 오희영(1924년생)·오희옥(1926년생)을 낳았다. 이후 오광선이 임시정부의 명을 따라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때 오영걸(1936년생)이 태어났다. 오희영은 1944년 김구 주석의 사무실 비서 겸 선전부 선전원으로 활동하던 때 김구의 경호업무를 맡고 있던 신송식(1914년생)과 결혼하였다.
위와는 다르지만,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중 뒤늦게 결혼한 독립운동가도 있다. 엄항섭(1898년생)은 비교적 늦은 30세에 연병한의 딸 연미당(1908년생)을 만나 1927년 3월 상하이에서 결혼하였다. 엄항섭은 보성법률상업학교 졸업 후 3·1운동에 가담한 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항저우 지장대학之江大學을 다녔다. 졸업 후 임시정부에 복귀하여 활동하다가 연미당을 만나 결혼한 것이다. 다른 예로, 이승만(1875~1965)은 임시정부 대표로 1934년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했다가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프란체스카(1990~1992)를 만났고, 그 뒤 그해 10월 미국 뉴욕 클레어몬트 호텔에서 결혼했다.
독립운동가 중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활동 중에 재혼·중혼하여 부부 독립운동가가 된 분들이 있다. 조성환·차리석·김규식·조소앙·양우조·김성숙·김학규·이범석 등이다. 이들은 오랫동안 홀로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새로운 인연을 만나 같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제국군 출신의 조성환(1875~1948)은 신민회가 추진하던 국외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연해주로 건너가 최재형을 만나고서는 베이징에 거점을 만들기로 하였다. 이후 그는 1909년 2월 부인 조순구(1876~1952)와 함께 베이징으로 망명하였고, 1912년 8월 딸 조연경이 태어났다. 그는 베이징을 거점으로 상하이,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 이후 밀산으로 이동하였다가 1921년 10월 베이징으로 돌아와 약 1년간 체류하였다. 이때 그는 중국인 이숙진(1900년생)과 새로운 인연을 맺었다. 이후 조성환은 북만주 등지에서 무장투쟁을 도모하거나 1926년 10월 베이징에서 대독립당조직베이징촉성회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31년 4월 딸 조연경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임시정부가 항저우에 머물 때, 조성환은 1933년 2월 임시정부를 다시 찾았다. 그 뒤 조성환은 환국할 때까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고 광복군 창설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숙진은 임시정부 이동 시기 요인들과 함께 갖은 고초를 겪었고 충칭에 도착한 뒤로는 한국혁명여성동맹,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차리석(1881~1945)은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하였는데, 1922년 부인 강리성이 차영애(1911년생)·차영희(1918년생)를 데리고 그곳으로 찾아왔다. 부인은 남편을 보필하였고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유랑 길을 떠날 때도 같이했다. 그 뒤 인성학교 교원으로 활동하던 차영애가 1935년 1월 중국군관학교간부훈련단 출신의 진장권과 결혼하였다. 그 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940년경 부인은 둘째 딸 차영희를 데리고 귀국하였다. 이후 홀로 남게 된 차리석은 충칭에서 유한책임한국광복군총사령부관병 소비합작사에서 근무하던 홍매영(1913년생)과 생활하게 되었고 1944년 아들 차영조를 낳았다.
김규식(1881~1950)은 1904년 프린스턴대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러일전쟁 발발 직후에 귀국하여 기독교계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중 1906년 5월 조은애와 결혼하였다. 이후 1907년 김진필이 출생했으나 얼마 뒤 병사하였고, 1910년에 김진동이 태어났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1913년 상하이로 망명했지만, 1917년에 부인이 폐병으로 사망하였다. 그 뒤 1919년 1월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차 떠나기 전 1918년 12월 말 난징의 한 선교사의 집에서 김순애와 간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둘 사이를 이어 준 것은 형부 서병호와 오빠 김필순이었다. 둘 사이에 김한애(1923년생)·김민애(1924년생)·김우애(1925년생)·김진세(1926년생) 등을 두었다.
조소앙(1887~1958)은 1913년 8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고 얼마 뒤 부인 오영선이 두 아들(조일제·조시제)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왔다. 얼마 뒤 1915년 조소앙은 부인과 아들들과 함께 귀국하였고 몇 해 동안 국내에서 활동하였는데, 몸에 큰 종기가 나서 몇 개월 동안 치료받았다. 건강을 회복한 조소앙은 1917년 다시 상하이로 떠나갔는데, 이 무렵 혼자 생활하다가 박달학원을 다녔던 최형록(1895~1968)과 결혼하였다. 최형록은 첫 부인 오영선이 국내에서 중국으로 들어오는 1935년까지 조소앙을 보필하였고, 해방될 때까지 독립운동을 펼쳤다.
임시정부 재무부 차장 양우조(1897~1964)는 1937년 진장 임시정부 청사에서 최선화(1911~2003)와 재혼하였다. 결혼식은 김구의 주례로 임시정부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거행됐다. 최선화가 1931년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때 잠시 국내에 들어간 양우조를 소개받아 만나게 되었다. 양우조는 1915년 북미지방총회 총회장 강명회의 딸 강영실과 결혼하였지만, 1930년대 초반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뛰어들면서 전처와 소원해져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김성숙(1898~1969)은 승려로서 부인 정씨와 결혼하여 김숙녀(1916년생)·김정봉(1922년생)을 두었는데, 1923년 베이징으로 망명한 뒤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중 1929년 중국 여성 두쥔훼이杜群惠(1904~1981)를 만나 결혼하였다. 두쥔훼이는 한중우호와 항일 운동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약하였다. 둘 사이에 두감· 두건·두련 등 3형제가 태어났다. 김성숙이 1945년 12월 환국하자 두쥔훼이는 중국에 남았고 자식들의 성을 자신의 것으로 모두 바꿨다.
김학규(1900~1967)는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였고 그 무렵 김봉수와 결혼해 둘 사이에 김일현(1922년생)·김탄실·김은순(1929년생) 3남매를 두었다. 그는 1929년 양세봉 등이 조직한 조선혁명군에 들어가서 참모장으로 활동했는데, 1931년경 동명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오광심(1910~1976)을 만나 인연을 맺었다. 둘 사이에 1954년경 김일진이 태어났다.
이범석(1900~1972)은 경성고보 재학 중인 1915년 가을 천안군수 김승현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런데 당시 이범석은 중국 망명을 결심한 때였고 실제 1915년 12월 하순 만주로 망명하면서 부인과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그는 청산리 전투 이후 연해주 이만(달네레첸스크)으로 넘어가 1923년 시베리아 톰스크에서 올레리아와 만나 동거하였으나, 그가 자살한 뒤로 1925년 8월 러시아로 귀화한 김마리아(1903~1970)와 결혼하였다. 둘 사이에 이부흥과 이인종을 두었으나, 이부흥은 요절한 듯하다. 1934년 이범석은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을 가르치면서 임시정부와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후 부인은 남편을 보좌하였다. 특히 김마리아는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설되자 참모장 이범석을 보좌하며 러시아 교관으로 광복군 대원 교육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