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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파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황기환

특집

파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황기환

─ 글. 윤선자(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황기환 지사

©국가보훈부

출생, 미국행, 그리고 1차 세계대전 참전

황기환黃玘煥(이명 黃杞煥, 黃紀煥, 黃琪煥, 黃忋煥, Earl K. Whang, Earl Whang)은 1886년 평남 순천平南 順天 에서 태어났다.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갔고, 1906년 6월까지 공립共立 협회 레드랜드 지회(1905.12.26. 설립)의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때 지원하여 유럽전선으로 갔는데, 기독교청년회 사업으로 중상자 구호를 담당하였다.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부, 파리위원부에서 독립을 위한 홍보활동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었지만 황기환은 독일에 남았고, 김규식의 제안을 받고 파리로 이동하였다. 한국독립운동은 유럽에서도 전개되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개최된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조직된 파리위원부를 중심으로해서였다. 1919년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은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과 파리강화회의 대한민국위원 겸 대한민국 파리주재 한국대표부(Mission Corénne) 대표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한국대표부에는 김규흥, 이관용이 합류하였다.
황기환은 1919년 6월 3일 한국대표부에 도착하였고, 한국대표부 서기장으로 임용되었다. 한국대표부는 파리강화회의 의장을 비롯하여 각국 대표들에게 한국독립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한국문제에 관심 갖는 이들은 없었다.
파리강화회의가 폐회된 후 한국대표부는 파리위원부가 되었고 외교활동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파리위원부 위원장 김규식은 1919년 8월 8일 미국으로 출발하였고, 부위원장 이관용은 학업을 계속하겠다며 파리위원부를 떠났다. 따라서 1919년 8월 이후 파리위원부는 황기환이 담당했다.
황기환은 1919년 8월 23일 3·1운동 이후 일본이 발표한 한국통치방침에 대하여 프랑스 신문 『라 프티 르프브리크(La Petit Republique)』와 인터뷰하였다.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한국과 일본이 화해하는 방법은 한국이 독립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 인터뷰는 미국에서 간행된 『신한민보』(1919.9.23., “패리쓰 우리 대사관에서 반포한 선언”)에 번역 수록되었다.
1920년 1월 8일 황기환은 파리지리연구회에서 한국문제 대연설회를 개최하였다. 500여 명이 참석한 연설회는 파리대학 샬레(Félicien Robert Challaye: 沙萊助) 교수의 한국독립운동 목격담, 일본군에게 난도참사亂刀斬死 당한 독립운동가의 참상을 보여주는 환등 상영으로 이어졌다. 2월 11일에는 『뉴욕 헤럴드(New York Herold)』와 인터뷰하였다. 한국문제는 세계의 문제이고, 한국인은 자유와 자결을 위해 제국주의와 싸우는 중이며, 이천만 한국인의 요구는 절대 독립으로 어떠한 강압도 한국인의 기백을 꺾을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3월 12일에는 파리외방전교회 본부(Rue du Bac, Paris, France)에서 한국천주교선교사 드망즈(Florian Demange: 한국명 안세화安世華) 주교를 만났다. 드망즈 주교는 그의 일기에, 황기환이 당시 32세이고 서울에서 천주교신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세례를 받았고, 12년 전에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으며,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2년간 프랑스에서 전쟁을 하였으며, 동원 해제 후에도 계속 남아 있다고 기록하였다.
1920년 5월 10일 구미위원부는 유럽홍보활동을 파리에서 영국 런던 중심으로 변경하였다. 구미위원부는 1919년 4월 25일 이승만이 설치한 정부대표사무소(‘대한공화국 임시사무소’ 또는 ‘한국공화정부 공관’)를 그해 8월 25일에 개편한 것이었다. 황기환은 파리위원부 폐지 불가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구미위원부 위원장 김규식은 파리위원부를 통해 추진한 활동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황기환은 런던과 파리의 사무소를 모두 운영하고자 하였는데, 그의 상급자인 구미위원장 김규식은 황기환과 생각이 달랐다.
파리에서 런던까지 홍보활동 범위의 확대, 위원장 김규식과 다른 의견, 홍보활동비 축소 등으로 고민하던 황기환은 미국여행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미주 및 하와이의 한인들이 비판할 것이라며, 프랑스에서의 2주 휴식을 제안하였다.
1920년 5월 잡지 『자유한국(La Corée Libre)』 제1호를 프랑스어와 영어로 1,000부 발행하였다. 『자유한국』의 발행 목적은 “조국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었는데, 황기환은 유럽의 각 언론기관과 정부, 저명인사들에게 이 잡지를 보냈다.
1920년 9월 2일 황기환은 런던위원부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0월 26일 ‘대영제국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the Korea in Great Britain)’ 창립대회 연설에서 자신이 런던에 온 이유는 영국이 세계의 고통받는 민족들의 등대이기에, 그리고 한영 조약 체결 이후 좋은 친구이기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런던의 자유교회·세례교회·예수교연합회에서도 한국의 참상을 호소하던 황기환은 1921년 4월 런던경찰국에 소환당하였다. 일본왕자 히로히토裕仁를 영국 방문 중에 암살하려 한다는 혐의였다. 황기환은 일본대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에게 “한국인들은 암살자가 아니다.”라는 항의서한을 보냈고, 언론사들에도 일본인들이 그러한 소문을 퍼뜨렸으리라는 항의서를 보냈다. 1921년 6월 23일에는 프랑스의 ‘한국친우회(Les Ami De la Corée)’ 결성식에서 서툰 프랑스어로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짤막한 연설을 하였다.

파리강화회의 임시정부대표단 | 맨 오른쪽 인물이 황기환 지사

©독립기념관

1920년 12월에는 『구주의 우리사업』을 간행하여 파리위원부의 외교활동을 정리하였다. 유럽은 세계정치의 중심이기에 세계 공론公論 을 환기하려면 유럽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홍보활동이 중요한 이유는 현대정치가 국민여론 위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신문·정객을 돈으로 매수하고, 한국문제를 허위선전하는 출판물을 유럽사회에 대규모로 살포하는데, 파리위원부는 인원, 재정, 재료 공급 등 모든 것이 부족하고, 그마저도 동포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한다고 한탄하였다.
1921년 6월 12일 황기환은 영국에서 개최된 대영제국 식민지수상회의에 참석한 수상들에게 「일본의 통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조선사람의 청원(The Appeal of the Korean People for Liberation from Japan)」 이라 제한 인쇄물을 배부하고, 일본대사 하야시 곤스케에게도 보냈다. 인쇄물에는 4,200년의 한국역사, 한영조약, 포악한 힘에 의해 맺어진 ‘(을사)보호조약’과 일한병합, 일제의 압제, 만주와 한국에서 상업권을 농락하고 한국인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한 것 등이 언급되었다. 상대국이위험에 처하면 돕는다고 했던 한·영조약과, 일제의 한국 침략과수탈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황기환이 기대한 효과는 거둘 수 없었다.

한국인 노동자와 학생들 후원

황기환은 유학생을 비롯하여 파리에 온 한국인들을 돕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북러시아에 출병했던 연합군이 철병하자 파리위원부는 러시아 무르만스크(Mourmansk)에 있던 한국인 노동자 500여 명을 프랑스로 데려오기 위해 프랑스 노동부와 교섭하고 이를 무르만스크에 통지하였다. 500여 명 중 200명이 영국 에든버러(Edinburgh)에 도착 예정이라는 통지를 받은 황기환은 에든버러로 가서 한국인 노동자 200명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프랑스로 데려가기 위해 영국과 교섭하였는데, 주영駐英 일본대사관이 그 한국인들을 중국 칭다오靑島 로 데려간다는 말을 들었다. 프랑스 노동부도 프랑스인들이 동양노동자를 배척하기 때문에 한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할 수 없다고 통지하였다.
200명 중 35명이 11월 11일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였고, 그 외는 대부분 동양으로 보내졌다. 35명의 한국인 노동자들은 프랑스 노동부가 지정한 파리 동북 쉬이프(Suippes)에서 11월 19일부터 전지戰地 수선공사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그날 ‘재법 한국민회在法韓國民會’ 를 조직하였다. 이 회는 유럽 최초의 한인韓人 단체로 850프랑을 적십자회 본부에 보내도록 황기환에게 맡겼고, 60프랑을 파리위원부에 기부하였다.
황기환은 한국인 유학생들에게도 도움을 주었다. 1919년 11월 26일부터 1920년 12월 14일까지 1년여 동안 8회 65명의 한국인 유학생들이 파리에 도착하였다. 황기환은 저렴한 학비 등 미주보다 유럽이 공부하기에 좋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많은 학생들이 미국으로 가고자 하였고, 황기환은 그들의 미국행을 도왔다. 상하이에서 파리에 온 학생 임장춘이 여비 부족으로 미주에 가지 못하고 한 달 동안 노동하다가 8~9개월 동안 입원하였는데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도 없으니 300달러 여비를 도와달라며 신한민보사에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사무소(샤토덩 뤼 38)
| 파리위원부 전반기 건물

©독립기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사무소(비엔느 뤼 13)
| 파리위원부 후반기 건물

©독립기념관

미국에서 워싱턴회의 준비

파리위원부 활동과 함께 한국인 노동자·유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던 황기환은 이승만으로부터 미국으로 오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은 유럽홍보활동을 중단 내지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황기환을 대신하여 파리와 런던에서 홍보활동을 전개할 사람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기환은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이승만·현순 등과 워싱턴 회의(1921.11.12.~1922.2.6.)에 제출할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였다.
이 일이 유럽홍보활동 못지 않게 중요하고 긴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일본인들이 워싱턴으로 몰려들어 홍보활동에열을 쏟았다. 한 일본의원이, 일본신문과 지식계급은 한국독립을허가할 뜻이 있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 황기환은, “그대가 일본의회에 한국독립안을 제출하겠는가?” 물었고, 그 일본의원은 자리를 피했다. 워싱턴 회의는 한국문제를 외면하였다. 이후 황기환은 뉴욕과 런던을 오가며 외교선전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리고1923년 4월 18일 뉴욕에서 심장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황기환의 사망 소식에 프랑스 한국친우회 사무총장 샬레는 조국의 해방 과 국제 정의를 위해 헌신한 황기환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하였다.

대한인 황기환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황기환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고, 퀸즈 메스패스 마운트 올리벳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황기환의 유해를 2023년 4월 10일 한국으로 봉환하여 대전현충원에 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