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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생활탐색

재능과 직업으로 독립에 기여한
독립운동가들

임정 생활탐색

재능과 직업으로 독립에 기여한
독립운동가들

성공하기 위해 아주 쉬운 선택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일항쟁기 누군가는 ‘어려운 선택’을 고집했다. 자신의 직업을 활용해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사용해 '어려운 길'을 걸었던 인물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글. 정상규(역사전문작가)

대일항쟁기 조선총독부 기록에 따르면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에 참여한 인구는 총 xx 명으로 집계된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전국 방방곡곡 구체적인 통계자료를 합산, 총 200만 명에 해당하는 만세운동 참여 수가 집계되었다. 만세 시위 누락1 , 검거자 수 축소2 , 사상자 축소 및 누락3 , 제암리 학살 만행4 누락 등 일본 측의 통계 수치 왜곡을 제외하고도 3·1운동 참여의 기간을 언제까지 보느냐에 따라 최대 300만 명까지도 집계가 가능하다.5 이는 6명에 한 명꼴로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다. 추가로 당시 한 가족의 구성원에 대한 통계자료를 살펴보면, 당시 한 가족은 평균 6명에서 많게는 9명까지 자식을 두었다. 이를 종합하면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거국적인 만세운동은 전국 모든 가정에서 한 명 이상의 독립운동가가 있었음을 말해준다.6 이는 매우 충격적인 기록이다. 지금까지 한국사 교육제도에는 독립운동가는 용맹하며, 불의를 참지 못하고, 두려움을 극복한 ‘타고난’ 인물로 서술되곤 했다. 그러나 많은 사료(유서, 일기, 검찰 신문조서 등)를 살펴보면 그들 역시 우리와 똑같이 두려움을 느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는 타고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보통 사람들이었고, 두려움이 없던 것이 아니라 두려웠음에도 특별한 ‘선택’을 함으로써 역사에 ‘영웅’으로 기록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어떤 선택이 특별한 선택일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성공이라는 키워드는 다양하게 해석이 된다. 특정한 부를 취득한 사람, 좋은 대학을 입학한 사람,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대기업에 취업한 사람, 집안 좋은 배우자를 만난 사람 등 매우 세속적인 기준들이 성공의 다른 이름으로 거론된다. 이는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결혼정보회사의 배우자 기준표에 매우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그렇다. 한국에서는 돈을 많이 벌고, 좋은 학교와 회사를 간 사람, 결혼을 잘 한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 통용된다. 그러면 이러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 공통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국 사회에서 그것은 단연 ‘교육’이다. 즉 교육을 통해 가난의 고리를 끊고, 좋은 학교와 회사를 통해 좋은 인맥을 형성하고 나아가 좋은 배우자까지··· .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바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잠시 대일항쟁기, 일본제국의 식민 지배를 당하던 시절을 떠올려 보자. 이때도 성공의 모습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게 있다. 그러한 성공을 얻기 위해서 오늘날에는 대다수 개인의 노력과 가족의 희생 혹은 헌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식민 지배 시절에는 ‘친일’을 선택하는 순간 이 모든 것이 보장된다. 이는 사회 전체에 큰 혼란을 가져왔고, 같은 민족끼리 서로서로 불신하게 했으며, 정의와 부정의가 혼재되는 혼탁하고 암울한 세상을 만들어 냈다. 필자는 이를 ‘쉬운 선택지’ 혹은 ‘부정의한 선택’이라 부른다. 성공하기 위해 아주 쉬운 선택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일항쟁기 누군가는 ‘어려운 선택’을 고집했다. 그들은 ‘정의로운 선택’을 고집스러울 만큼 중요시했다. 누군가에게 0점짜리 아버지, 0점짜리 남편이 되는 길을 걸으면서. 역사학계에서는 이러한 선택을 흔히 ‘위대한 선택’이라고도 부른다. 결국 인간은 위대한 선택을 함으로써 위대한 인물이 된다는 말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가 어떠한 선택을 하냐에 따라 평범한 우리도 위대해질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선택을 함으로써 위대해진 사람들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에는 자신의 직업을 활용해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사용한 인물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인자유대회에서 독립선언을 기념하는 한인들 속 유일한
(1919.4.16)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업가, 유일한

유일한(본명 유일형)은 평양에서 태어나 9살의 나이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09년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만든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 학교에 입학한 뒤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거나 군사 훈련을 받았다. 지금도 미국 현지에서 동양인이 넘기 어려운 벽인 미식축구부 주장을 맡을 정도로 운동에도 재능이 있었다. 대학생 시절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했다. 청년 세대 대표로 한국의 독립을 외친 그는 당시 30살의 나이 차를 두고 재미 한인 지도자 중 한명인 서재필과 나란히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대학교 졸업 후 3년간 제네럴일렉트릭 회사에서 근무하다 대학동창 웰리스 스미스와 동업으로 ‘라초이(La Choy)’라는 식품 회사를 창업해 큰 성공을 거뒀다. 아시아인들이 즐겨 먹던 숙주나물 요리를 저장·보관하기 위해 통조림을 개발한 것이었다. 유일한은 당시 극소수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어 낸 손꼽히는 조선인이었다. 거래처 확보를 위해 중국에 다녀오면서 국내에 잠시 머물렀던 유일한은 의약품을 구하지 못하는 동포들을 보며 고국을 위해 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미주한인들이 만든 독립운동단체 ‘재미한족연합 위원회’ 집행부 위원에 선임되었는데, 단체운영자금을 기부하며 독립운동자금 조성에 크게 기여했다. 그로부터 8개월 뒤, 일본은 진주만을 폭격했고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 유일한은 회사 사람들에게 잠시 안식년을 가지며 미국에서 휴식을 취하겠다고 말한 뒤 미국 CIA 전신인 전략정보처 OSS로 향해 미군 특수부대의 자원입대를 선택했다. 작전명 ‘NAPKO’로 훗날 CIA기밀문서가 공개되며 언제든 목숨을 잃어도 기록조차 남지 않을 선택을 한 특수부대 비밀작전 요원들에 유일한이 등장 했다. 이 정보는 그의 사후에 발견되었으며 생전 그는 자신의 이러한 선택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광복 후 유일한은 개인 소유주식을 처분해 유한공업고등학교를 건립했고 개인 소유주식 12,000주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기부했으며, 기업의 부패를 막기 위해 회사에서 아들과 집안사람들을 모두 내보냈다. 결국 대한민국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 전문경영인(CEO) 제도를 도입했고 제약업계 최초로 상장사가 되어 기업경영을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했다. 그는 시대의 양심이 된 청렴한 기업인이었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실천한 독립운동가였다.

김염 사진(20세기초)

©박규원

영화로 독립운동을 펼친 배우, 김염

김염(본명 김덕린)은 서울에서 태어나 2살 무렵 중국으로 건너갔다. 김염의 아버지 김필순은 한국 최초의 의사 출신 독립운동가다. 신민회 사건 이후 일제의 체포를 피해 가족들과 서간도로 망명했다. 김염이 10살이 되던 무렵 김필순은 독살로 사망한다. 아버지가 죽은 후 김염은 독립운동가 김규식 박사(고모부) 집에서 자라게 된다. 1927년 가난한 영화배우 지망생으로 중국 영화계에 뛰어든 김염은 당대 히트작 영화 〈야초한화野草閒花〉에 주연으로 캐스팅되며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1934년, 그는 중국인들에게 ‘영화 황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는데 가장 잘생긴 남자 배우, 가장 친구가 되고 싶은 배우, 가장 인기 있는 배우라는 세 개의 부문에서 김염이 모두 1위를 차지했다7. 1935년, 바쁜 촬영 일정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비밀리에 난징南京으로 향해 백범 김구를 만나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했다. 그는 영화배우로서 최고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항일 영화인으로서의 삶을 선언했으며 공산당원이 되기를 거부해 중국 문화대혁명 기간 수용소로 끌려갔다. 이후 극심한 노동에 병까지 얻어 투병 생활을 이어가다가 73세의 나이로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헤이그 특사(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1907년), 『만국평화회담보』

헤이그에 특파된 대한제국 1세대 검사, 이준

이준(본명 이선재)은 1895년 4월 법관양성소에 1회로 입학하여 이듬해인 1896년 2월 3일 법관양성소 졸업생 가운데는 제일 먼저 한성재판소 검사시보가 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식 검사가 탄생한 것이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직후 상동교회를 거점으로 그곳에 집결한 청년들이 을사늑약 반대운동을 주도했는데 이때 상소문을 지은 인물이 바로 이준이었다. 1907년 6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할 특사로 고종은 이준을 임명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의 보고에 의하면 ‘이 사건은 러시아 수도에 있었던 이범진李範晉이 미리 계획을 세워 블라디보스토크의 동의회同義會와 모의하였고 이 단체는 서울의 상동교회청년회에 통고하여 이상설, 이준에게 실행의 임무를 맡기기로 하였다’고 한다. 동의회는 당시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교민단체이자 의병단체이다. 회장은 최재형이고 훗날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도 참여하였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도 이 단체에서 준비한 일이었다. 상동청년회를 모태로 만들어진 비밀결사가 바로 신민회이다. 동의회와 상동청년회는 모두 당시 국권회복운동의 핵심 세력이었다. 이준을 비롯한 특사 일행은 현지에 도착한 이후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노력하였지만 대회 의장인 러시아의 넬리도프(Nelidof) 백작과 개최국인 네덜란드 정부 모두 특사의 대회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러한 답답한 상황에서 이준은 갑자기 숙소 드용호텔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유해는 헤이그에 묻혀 있다가 1963년이 되어서야 국내로 봉환되었다. 현재 서울대학교 로스쿨 건물 앞에 있는 인물상이기도 하다.

독립군 군의관이 된 한의사, 신홍균

1911년 한의사 신홍균은 가의家議를 거쳐 식솔을 이끌고 고향 함경도를 떠나 압록강을 건너 중국 봉천성 장백현 십칠도구에 도착했다. 1916년 당시 장백현 일대에서 포교 활동을 하던 천도교 출신 김중건을 만나 그와 함께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19년 일본 헌병 수색대의 장백현 왕가동 일대 조사 과정에서 신홍균의 동생 신동균이 살해당하고 압록강에 수장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이 항일 무장투쟁의 계기가 되어 1920년 5월 김중건과 같이 200여 명의 청년을 모아 독립군 대진단을 창설했다. 1920년 6월과 10월 봉오동과 청산리 일대에서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싸워 크게 승리하자, 같은 해 10월부터 3~4개월간 간도 지역 한인(민간인)을 일본군이 무참히 학살하는 만행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1921년 1월 15일, 대진단, 군비총단, 태극단, 흥업단, 광복단 등 장백현 지역에서 활동하던 중소규모 독립군 단체가 모두 모여 무력투쟁 결의 대회를 했다. 1932년 3월 1일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 만주국이 수립되고, 만주국 국방군인 만주군이 편성되자, 만주 지역에 거주해 온 한인들과 중국인들이 합심하여 공동의 적 일본제국을 향한 한중 연합작전을 펼치게 되었다. 1933년 3월 초, 한국 독립군의 지청천은 만주 지역 중소규모 독립군의 원조를 요청했고 이에 신홍균은 대진단원들을 이끌고 한국 독립군에게 합류했다. 한중연합군은 라자구羅子溝 지역에서 연길 현 방면으로 이동 준비를 하고 있던 1,600명 규모의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매복을 시작했다. 그러나 폭우와 굶주림의 연속이었고 결국 준비한 식량이 다 떨어져 독립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청천, 조경한 등 한국독립군 사령관과 참모장이 독립군의 사기를 북돋으려 노력했지만, 추운 날씨에 끼니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설상가상 빗물에 몸까지 젖어서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신홍균은 자신의 한의학 지식을 발휘해 산에서 자생하는 검은 버섯(목이버섯)을 따와 빗물에 씻어 독립군들에게 먹이기 시작했고, 그 후 대전자령 전투는 한중연합군의 대승으로 이어졌다. 신홍균은 만주 밀산 지역으로 이동한 뒤 독립운동을 이어 나가다 현지에서 사망했다.

임시정부의 살림꾼이었던 목사, 손정도

(왼쪽부터) 장낙도, 최병헌, 손정도, 김유순 목사

손정도는 기독교(감리교)와 독립운동의 두 영역에서 많은 자취를 남겼는데, 흔히 역사학계에서 남북을 포함해 조선족 자치구에서도 존경받는 독립운동가로 불린다. 1910년 7월 손정도는 베이징北京에서 신민회 일원으로 파견된 조성환을 만났다. 신민회는 안창호, 전덕기, 김구, 이동녕, 양기탁, 이승만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였다. 조성환을 통해 안창호를 소개받은 뒤 이들은 서로 호형호제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1912년 7월 하얼빈哈爾濱에서 ‘가쓰라 다로桂太郞 암살모의 사건’의 주모자 혐의로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그 후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한 자금 조달책 역할과 조직망의 가동을 책임지는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손정도는 수많은 개척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며 독립운동 자금 전달, 소식 전달책 역할을 자행했고, 부모 없는 고아, 길에서 노숙하는 버림받은 아이들을 품어 자식들과 함께 키워냈다. 누군가에게는 목사, 독립운동가, 그리고 보육원 원장이었던 셈이다. 우리가 잘 아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손병희를 설득하여 3‧1만세운동에 참여시킨 사람도 손정도였다. 거국적인 만세운동 이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김규식으로부터 임시정부 수립을 제안받은 뒤 현순, 안창호와 함께 임시정부 창립에 전념했다. 손정도는 임시정부의 살림꾼이었으나 신변의 노출을 우려해 각종 정부 요직에 이름 없이 비밀 요원처럼 활동하였고, 그의 타고난 품성은 종파를 초월하여 불교, 천도교 인사들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게 해 결국 그들로부터 임시정부 창립 자금까지 끌어냈다.8 1931년 2월 22일, 과로와 격무에 시달리던 그는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에 시달렸고, 결국 4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첫째 아들 손원일은 한국으로 돌아와 초대 해군 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오늘날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로 불린다.

1_ 1919.3.16.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일일 보고
2_ 1920.1. 조선총독부 ‘망동 사건 처분표’
3_ 1919.3.28. 조선군사령관 일일 보고
4_ 1919.9.29. 조선군사령부 ‘군대가 진압에 종사한 사건의 사상표’
5_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식자료
      http://19together100.pa.go.kr/lay2/S1T9C38/contents.do
6_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공식 지정한(건국훈장을 추서한) 독립유공자의 수는 총 1만 5천여 명이다. 또한, 3·1만세운동 사망자 수를 살펴보면, 전체 독립유공자의 절반이나 되는 수치이다. 이는 그 자체로도 매우 충격적인 수치이며 왜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되어 있는지 그 의미를 더욱 와닿게 한다.
7_영화잡지 ‘전성電聲’ 인기투표
8_천도교로부터 1만 원, 미국 선교부로부터 1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