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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들의 생활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집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들의 생활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 글. 김재기(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Diaspora Politics)

미주 지역 한인들의 집단적 디아스포라의 시작은 1903년 하와이로의 노동이민이다. 1903년에서 1905년까지 7,400여 명의 한인들이 하와이에 도착하여 여러 사탕수수 농장에서 힘든 노동을 해야 했다. 1905년에는 1,033명의 한인들이 멕시코 에네켄 농장으로 이주하여 가시에 찔려가며 뙤약볕에서 일을 해야 했다. 1921년에는 멕시코에 살던 한인들 중 288명이 쿠바 사탕수수와 에네켄 농장으로 이주하면서 지구촌 끝 카리브해에까지 한인들이 살게 되었다.
하와이를 비롯하여 멕시코와 쿠바 등 이국땅에서 나라 없는한인 디아스포라들의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고 권익을 보호했던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한 단체가 1909년에 설립된 대한인국민회이다. 대한인국민회는 나라 밖에서 나라 찾는 데 필요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1909년 2월 1일 박용만, 이승만, 안창호 등이 주도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는 미주 한인들 전체를 아우르는 최초의 결사체이다. 대한인국민회는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의거로 재미한인의 항일 열기가 고조되었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여러 단체가 통합하여야 한다는 필요성에 따라 창립되었다. 대한인국민회는 을사보호조약 폐기운동, 국권회복 및 동포의 안녕과 복리 신장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1

하와이섬에서 미국 본토와 멕시코, 쿠바섬까지 소수민족이자 이민자인 미주지역 한인들은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스스로를 지켰다. 1910년 국권상실 이후에는 대한인국민회가 보살펴줄 국가 없는 한인 디아스포라들에게 ‘정부’의 역할을 했다.
대한인국민회는 자체적으로 기관지 성격의 『신한민보』라는 신문을 발간했다. 『신한민보』는 타국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한인들에게 조국의 독립과 고단한 삶에 희망을 주는 매체였다.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에는 미주 지역 한인들의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타국에서 2세 아이들의 출생 소식, 결혼 소식, 사망 소식, 회갑 잔치, 개명 광고, 조선의 된장이나 고추장 광고 등을 보며 각기 다른 나라에 살지만 서로 소통했다.
식민지 조국의 소식과 만주와 연해주 등 해외 한인들의 끈질긴 독립운동 소식도 『신한민보』를 통해 접하면서 독립의 의지를 지속시켰다. 1919년 3·1운동 때나, 10년 후인 1929년에 발생한 광주학생독립운동 때는 ‘제2의 3·1운동’이라 평가하고 지지와 후원금을 낸 소식을 보도했다. 특히 멕시코와 쿠바의 한인들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인구세, 의무금, 의연금, 광복군비, 외교비, 3·1 성금, 내지동포 구제금 등 다양한 형태의 독립자금을 모금한 소식도 『신한민보』에 보도했다.
미주 한인들이 상하이 임시정부와 긴밀한 관계 속에 독립자금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는 근거는 1930년 5월 1일자 『신한민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소식이 미주 지역에 알려지자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어려움에 처한 학생들을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을 진행해 후원금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냈는데, 임시정부의 재정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는 김구 선생의 감사 편지 원문이 『신한민보』에 실려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이후 1930년 미국에 보낸 김구 선생의 감사 편지는 90년 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필자는 2016년 미국 뉴욕에 연구년을 맞아 체류 중 북미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를 접했다. 이 과정에서 김구 선생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언급한 편지를 『신한민보』에서 찾아냈으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의 백일규(건국훈장 독립장) 총회장에게 보낸 편지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 편지는 김구 선생이 집필한 『백범일지』나 1999년에 발간된 『백범김구전집』(12권)에 김구 선생이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해서 평가한 내용이 없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자료이다. 이 편지는 1930년 4월 2일 상하이에서 배편으로 샌프란시스코로 보낸 것으로, 1930년 5월 1일자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 3면 상단에 실렸다. 김구 선생이 대한인국민회 백일규 총회장에게 보낸 편지는 『신한민보』에 A4 한 장 크기로 본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어 일부 소개한다.

1__대한인국민회는 1909년 2월 1일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를 통합하여 '국민회'라는 명칭으로 창립되었다. 이후 1910년 5월 10일, 국민회가 대동보국회와 통합되면서 '대한인국민회'라는 명칭으로 개편되었다.

「미국 뉴욕 정원도 선생(건국훈장 애족장)의 별세 기사」,
『신한민보』

©김재기

「쿠바 마탄사스 고창덕(대통령표창)의 회갑 잔치」,
『신한민보』

©김재기

「쿠바 김세원(건국포장)의 아들 개명 광고」,
『신한민보』

©김재기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수영(대통령표창)의 한국의 간장과 고추장 광고」,
『신한민보』

©김재기

“다시금 감축한 것은 수년간 우리 독립운동이 침체 상태에 빠졌던 현상이 광주학생운동으로 기인되어 강경히 진작振作됨을 따라 정부의 비용도 가일층 호번浩繁한 차시에 그것까지 유념하시고 전자 영수증 받지 못함도 불구하시고 성의를 다하시와 인구세를 또다시 보내주심을 더욱 감격합니다.”

『신한민보』가 보도한 이 편지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이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해 직접 언급하며 높게 평가한 최초의 문건이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미주 한인들이 지속적으로 독립자금을 송금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 편지를 통해 미국, 멕시코, 쿠바 등 미주 지역 한인 디아스포라들이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인해 상하이 임시정부를운영하는 재정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이 편지에는 미주 한인들이 보낸 ‘인구세’ 이야기만 나오지만 『백범일지』에 매우 구체적으로 미주 한인들의 독립자금 송금에 대한 기록이 적혀있다.

“시카고에 있는 김경(건국훈장 애국장)은 그곳 공동회에서 모은 것이라 하야 집세(임시정부)나 하라고 미화 이백불을 보내어 왔다. 당시 임시정부의 형편으로는 이것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돈은 돈이어니와 동포들의 정성이 고마웠다. 김경은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다.”

“멕시코에서는 김기창(건국훈장 애국장), 이종오(건국포장), 큐바에서는 임천택(건국훈장 애국장)과 박창운(건국훈장 애족장) 등 제씨가 임시정부에 후원했다.”

미주 한인들은 심각한 경제난 속에서도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냈다. 이러한 공로로 300여 분이 귀중한 서훈에 추서되었다. 그런데 이 귀중한 서훈이 상당 부분 후손들에게 전수가 안 되고 있다. 특히 멕시코의 경우 60여 분 중 40여 분에게 전수가 안 되었다. 쿠바의 경우 서훈 추서자 43분 중 8분의 후손에게만 전수가 되었다.
코로나로 중단되었던 멕시코와 쿠바 한인 후손 찾기 봉사활동을 위해 2023년 1월부터 4월까지 하와이와 멕시코, 쿠바, 뉴욕을 방문했다. 하와이 이민 120주년이 되는 해에 다이아몬드 헤드 묘지 등 4곳에 묻힌 1,000여 기(2,000여 명)의 한인 묘비를 사진으로 찍어 분석 중이다. 멕시코와 쿠바를 방문하여 이기삼(대통령표창), 김성민(건국포장), 이돈의(대통령표창), 이학서(건국훈장 애족장), 노덕현(건국포장), 김치명(건국포장), 이근영(건국훈장 애족장), 허완(대통령표창), 김영성(건국포장), 안순필(건국포장), 안옥희(대통령표창), 한익권(건국포장) 선생 등의 서훈 미전수 후손들을 새롭게 발굴하였다.
멕시코와 쿠바에는 대한인국민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납부한 공적이 있는 300여 분의 미서훈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 차원의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이유이다.

「상해에서 김구 선생이 샌프란시스코의 백일규 총회장에게 보낸 편지」, 『신한민보』

©김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