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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생활탐색

『독립신문』 만평을 통해 보는 상해 한인들의 생활 문화

임정 생활탐색

『독립신문』 만평을 통해 보는 상해 한인들의 생활 문화

독립신문의 지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포고문을 비롯하여 법령, 국무회의와 임시의정원 관련 기사, 독립운동의 당위를 주장하는 논설들이 넘쳐났다.

— 글.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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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8월 21일 중국 상해에서 창간된 『독립신문』은 1926년 폐간될 때까지 활발한 항일필봉투쟁을 벌였다. 독립신문의 지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포고문을 비롯하여 법령, 국무회의와 임시의정원 관련 기사, 독립운동의 당위를 주장하는 논설들이 넘쳐났다. 주의력 깊은 독자라면 그 속에서 「군소리」라는 제목의 짤막한 만평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만평 「군소리」는 독립신문 창간 다음 달인 1919년 9월 20일부터 11월 15일까지 17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군소리」를 쓴 이는 자신을 독립신문 기자로 밝힌 ‘첨구자尖口子’라는 필명의 인물이다. 독립운동가 조동호로 추정되는 첨구자는 상해 독립운동진영과 한인사회에 대한 풍자와 비평, 감시라는 언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는 ‘뾰족한 입’의 소유자답게 상해 독립운동의 내밀한 모습과 인간군상들을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자유롭고도 거침없이 풍자하고 비평하였다. 물론 내용 가운데 주관적이고 과장된 내용이 없지 않지만 첨구자의 만평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직후 상해 한인들의 생활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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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소리는 상해 한인들의 소비문화에 대해 날카롭게 풍자하였다. 임시정부 수립 직후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에 온 경우 고국에서 가산을 처분하고 온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이주 초기 한인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그들은 국내에서 억눌렸던 소비 욕구를 자유롭게 표출하곤 했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친 경우가 더러 있었다.

©독립기념관

누구나마 國務總理 한번만 차자 뵈우면 大洋四五十元짜리 洋服에 거둘어거리고 밤이면 先施永安 기상家로 단이며 「부란데」 「위쓰기」에 泥醉하야 오는 군들 良心에 쓰리지 안을가. 한 달에 包飯五元자리 잡수시고 露草 마라 피우시고 半間房에 게시고 二三元자리 中服 입으시는 誠齋先生을 좀 뵈아(『독립신문』, 1919-10-04. 이하 날짜만 표기함).

일부 상해 한인들이 상해 번화가에서 환락에 빠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싼 양복에 밤이면 고급 요리점이나 ‘기상家’ 즉 기생집을 다니며 양주에 취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치 현상에 대해 첨구자는 ‘誠齋先生’을 본받으라고 하였다. ‘성재선생’은 다름아닌 이동휘를 가리킨다. 이동휘의 검소한 생활은 유명했던 것 같다. 첨구자는 이동휘가 상해에 온 후 1달에 5원하는 ‘포반包飯’ 즉 월 식사로 해결하고 있으며 값싼 의복에 누추한 곳에서 기거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첨구자는 사치와 환락을 일삼는 일부 한인들에게 검소하게 생활하는 이동휘를 본받을 것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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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한인들의 지나친 음주 문화도 종종 문제가 되었다. 술은 전 세계 인류가 농경생활을 시작한 이래 줄곧 함께 해온 기호품이다. 인간의 의식에 신성함을 더해 주고 축제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주는 술은 사람 사이의 소통에 윤활유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지나친 음주는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19세기 한국에서 활동했던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에 의하면, 음주벽의 폐단은 일일이 다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라를 황폐하게 하였다고 한다. 지나친 음주문화는 한인들에게는 그리 심각하게 인식되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관대하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첨구자는 한인들이 음식점에서 시중드는 사람들에게 역정을 내고 음식값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풍자하였다.

… 料理店客主 갓흔 데셔도 아모조록 下人에게 親切히 厚히 하는 것이 紳士롭소. 下人들을 向하야 셩을 내고 金額을 다 토는 昌披는 如干一二元돈에 비길 수가 업다오. …… (1919-09-20).

음식점에서 한인들이 종업원들에게 화를 내고 음식 비용을 다투는 경우가 적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력거 운임과 마찬가지로 음식 비용을 둘러싸고도 시비가 많았다. 실제로 음식점에서 종업원과 시비가 붙었다가 경찰에 끌려가는 경우도 있었다. 첨구자는 한인들이 음식점에서 종업원들에게 친절하게 대할 것을 당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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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구자는 한인들의 상해 현지 중국인 인력거꾼에 대한 태도 문제를 지적하였다. 첨구자는 상해 현지사회 최하층 계급인 중국인 인력거꾼들의 존재를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바라보았다. 그는 1919년 당시 상해에서 한인들이 인력거꾼과 다투고 그들을 천대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人力車군과 다토는 紳士의 樣은 참 昌披莫甚하오. 더구나 人力車군에게 손을 대고 발길질을 하야 銅錢一二分을 得하노라고 (타마가초비)의 詬辱을 當함은 紳士의 못할 일. 우리 紳士中에 그러한 어른이 게시거든 翻然改過하실 일 何必 人力車군이리오. ⋯ 이로붓터 米價는 暴騰하고 日氣는 漸漸 寒冷하여 가는데 人力車 끄는 親舊들의 情境은 더욱 可憐할 것이외다. 不公平한 社會制度를 根本的으로 改造키는 從此로 하고 爲先 부대(디) 銅錢分式이나 넉넉히 주실 일(1919-09-20).

첨구자는 한인 ‘신사紳士’들이 운임 한두 푼을 아끼기 위해 ‘인력거人力車군’과 다투고 심지어는 그들에게 손을 대고 발길질을 하는 모습을 ‘창피막심’한 것으로 꼬집었다. 그 때문에 ‘후욕詬辱’ 즉 비난받은 후욕 한인 신사들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첨구자는 사회적 약자인 인력거꾼들을 지식인 특유의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당장 불공평한 사회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것은 힘들지만 우선은 미가의 폭등과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고생하는 불쌍한 인력거꾼들에게 운임을 넉넉하게 줄 것을 당부하였다. 계속하여 첨구자는 임시정부 관리들 가운데도 인력거꾼과 시비 끝에 싸우는 경우가 있다고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다.

政府官吏險談 하나 더 하리까. 政府문 아페서 人力車군과 쌈하는 것 브기 실여. 남이 보면 昌皮하고 내가 보면 구역이 나서(1919-10-11).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반 한인뿐만 아니라 심지어 임시정부 관리들 가운데서도 정부 청사 정문 앞에서 인력거꾼과 다투는 경우가 그리 드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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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구자는 상해 한인 여성들이 한복을 착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사회적 약자 계급인 인력거꾼에 대해서는 동정과 함께 사회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여 진보적인 측면을 보였지만, 여성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보수적이고 전통적이었다. 상해 한인 여성들에게 한복 착용을 고집스럽게 요구한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韓人이란 種族은 웨 그리 外國服을 닙기 됴화하는지 日本 가면 日本服 아라사 가면 아라사服 中國을 와보닛가 모조리 中國服을 닙엇단 말이야. 男子들은 제손으로 옷을 질 수도 업고 勿論 지어주는 이도 업고(大叚(段)히 서분한 現象이지만은) 그러타고 本家에서 붓쳐오기도 거븍하니 그러타 할망졍 婦人네들이야 무엇이 不足해셔 알뚤이 中國옷을 닙고 단닐까(1919-10-25).

한소리 또 함이 罪悚하나 군소리라 엇더랴(1919-11-11).

우리 衣服닙어 주십사고 日前에 뽀족한 입을 들넛던니 今番 總理就任式에 婦人二十餘名中 九分까지는 우리 服을 닙고 오서습 되다. 尖口子는 삼가 謝意를 表하는 바오이다(1919-11-11).

尖口子 卓上에 抗議를 提出한 者有하야 曰 「韓服은 沒個性的이오」 國粹歎美者인 尖口子도 對答할 말이 업섯서요. 洋人의 服이 조흔 것이 아니라 個人個人에게 또 드러맛게 지음으로 보기가 낫지요. 衣服改良이라니 別 것인가요. 우리 新女子 諸君의 一考치 아니치 못할 것이 안인가 하오. 에헴(1919-11-11).


첨구자는 한인 특히 여성들에게 한복 착용을 권장하고 있다. 양장을 입는 ‘新女子’ 즉 신여성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인 것 같다. 첨구자는 한인 여성들이 “아름다운 자기自己네 옷 버리고 보기 실흔 놈의 옷닙을 까닭이야잇나”라고 비평하였다. 여하튼 첨구자는 자신의 발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동휘 국무총리 취임식에는 참석한 여성들 가운데 90%가 한복을 입고 참석하였다고 하였다. 당시 행사 때 남자들은 양복, 여자들은 한복을 입는 것이 이미 하나의 관습으로 굳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 4월 상해 정안사공묘靜安寺公墓에서 거행된 안태국安泰國의 장례식 때 사진을 보면 남자들은 대개 양복차림이지만, 여성들은 한복 차림이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한복은 장구한 세월을 거쳐 그 맥과 전통이 여성들의 노력에 의해 지켜져 왔다고 하겠다. *

* 본고는 필자의 논문(「독립신문 만평의 상해 한인 독립운동과 생활문화 풍자 - 1919년 尖口子의 ‘군소리’를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1집, 2017)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Jamie Carstairs, University of Bristol Special Collections

상하이의 난징로, 1930년대

©Jamie Carstairs, University of Bristol Special Collec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