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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광복 이후 일간지에 비친 임시정부의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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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일간지에 비친 임시정부의 모습들

— 글. 김창희(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

찢어진 호외

이 한 장의 찢어진 호외는 기념비적인 인쇄물이다. 『서울신문』이 1945년 11월 23일 자로 발행한 이 호외는 광복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1진 환국 인사들이 이날 오후 4시 김포비행장에 도착했음을 최초로 알린 인쇄매체였다.
광복 무렵, 중국 충칭의 임시정부가 언제 귀국하느냐는 것은 한국민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유감스럽게도 미군정청은 그 도착 일정을 미리 알리지 않았다. 그날 비행장에 환영객은 한 사람도 없었다. 풍찬노숙의 애국지사들은 이렇게 귀국했다. 그들이 앞으로 맞을 신산한 세월을 예고하는 장면이었다.
이들의 귀국 소식이 언론사들에 전해진 것은 이날 오후 6시 무렵이었다. 이미 석간신문 제작이 끝난 뒤였다. 이때 『서울신문』이 결단을 내렸다. 본판 제작은 끝났고, 배달도 쉽지 않은 때였지만 시급히 한 면짜리 호외를 제작해 서울 중심가에라도 뿌리기로 했던 것이다.
『서울신문』은 일제 말 국내에서 유일하게 한글로 발간되던 『매일신보』(총독부 기관지)를 계승한 신문이었다. 신문 발행을 위한 확실한 인적·물적 진용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이 신문이 11월 22일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바꾸었는데, 공교롭게 다음날 임시정부의 귀국 소식이 전해졌다. 이들로서는 새 제호를 널리 알릴 절호의 기회를 맞았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 호외가 갖는 의미는 분명했다. 독립운동의 총지도부이자 광복 이후 새 나라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던 임시정부가 드디어 국내로 들어와 이제 그 실체를 국민 눈앞에 내보이는 역사적인 순간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기념관

서울신문 호외, 1945년 11월 23일자

개선, 그리고 망각

환국한 임시정부를 대하는 한국민들의 반응은 우선 ‘개선에 대한 환영’과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주체로 나서 주길 바라는 기대’였다. 나아가 ‘민족의 미래를 책임질 정치세력이 되었으면 하는 보다 적극적인 지지’도 만만치 않게 있었다.
이렇게 환영과 기대와 지지의 정서가 집약되어 나타난 것이 1945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봉영회’였다. 광복 무렵 서울 인구가 100만이 채 되지 않던 시절에 무려 15만 명의 인파가 몰린 이 환영회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입장, 태극기 게양, 애국가 제창, 이화여전 합창단의 환영가 제창, 홍명희의 환영사, 러치 미군정장관의 축사, 송진우의 환영사, 김구 주석의 답사, 이승만 박사의 답사, 만세삼창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그뿐 아니었다. 이날 광복 이후 처음으로 꽃전차가 운행했고, 서울 시내 모든 교회와 사찰, 학교에서 오전 11시 환영회 개회에 맞추어 일제히 종을 울렸다. 이는 임정 요인들의 개선을 축하하는 동시에 애국 선열들을 추모하는 종소리였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는 “백만 시민이 다함께 머리를 조아리고 묵상을 올렸다”(1945년 12월 20일 자)고 적었다.
모든 언론이 이 환영회와 그 전후의 일들을 12월 20일 자 지면에 그야말로 대서특필했다. 그중에서 『자유신문』은 당시 이 신문 문화부 기자였던 동양화가 김기창 화백의 그림을 기사에 덧붙여 이른바 ‘낙양洛陽의 지가紙價’를 올렸다.
이렇게 1945년 11~12월은 환국한 임시정부 관계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매체들의 기삿거리였다. 수행원들까지 인터뷰하면서 이들의 친필 서명을 받아 소개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은 연말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계기로 정국이 급격히 찬탁-반탁 논란으로 방향을 틀기까지 계속됐다.
그 뒤 해방정국에서 임시정부가 언론에 부각된 것은 신탁통치 반대운동, 과도정권 수립 활동, 임시정부 봉대운동, 그리고 1948년의 남북협상 등이었다. 그러나 1948년 5월 임시정부 그룹의 한국독립당이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지 않고, 1949년 6월 26일 김구 주석이 암살되면서 임시정부 그룹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것은 망각의 시대였다.

새날은 눈물과 함께 열리는가?

『조선일보』는 1960년 6월 26일 자(석간) 제3면에 ‘도산悼傘·누해淚海로 뒤덮은 공원公園’이라는 큰 제목과 ‘백범 선생 추도식 11년 만에 성대히’라는 부제 아래 김구의 11주기 추도식 기사를 대형 기사로 소개했다. 4·19혁명 두 달 뒤의 일이었다.
지금의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아무리 이승만과 김구가 정적이었다 해도, 이승만 정권 10년 동안 김구의 추도식조차 열 수 없었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는가? 게다가 1948년 정부 수립, 1949년 김구 암살, 1950년 임시정부 요인 납북 등을 거치며 임시정부는 1960년 4·19혁명이 오기까지 10년 동안 사실상 잊힌 존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1960년의 ‘첫 추도식’ 기사 자체가 4·19혁명으로 새 세상이 열렸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늘도 슬픈 듯 비 오는 서울 효창공원 묘소”라는 감상적인 표현 속에 지나간 세월에 대한 회오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원망이 뒤섞인, 당시 시민들의 정서가 묻어난다.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 환영회 자유신문, 1945.12.20.

환영임시정부주석일행환국歡迎臨時政府主席一行還國
조선일보 | 1945.11.25. 기사

환영임시정부주석일행환국歡迎臨時政府主席一行還國삼천만동포三千萬同胞의 지지支持바더자생독입완성自生獨立完成에매진邁進중앙방송국中央放送局마이크통해 김구주석환국金九主席還國첫인사그리운고국故國의 첫거름을들듸어논 후로 감격感激에사힌채 하로밤을 자고난 김구선생金九先生은 이십사일오후팔시二十四日午後八時 서울 중앙방송국中央放送局『마이크』를통하야 약오분約五分동안 삼천만동포三千萬同胞에게보내는 첫인사의말을 다음과가치 방송放送하엿다 친애親愛하는동포同胞여러분 이십칠년간二十七年間 이나 꿈에도 잇지못하고잇든조국강산祖國江山에 발을드려노케되니 감개무량感慨無量합니다
나는지난오일중경五日重慶을떠나 상해上海로와서이십이일二十二日까지 머물다가 이십삼일상해二十三日上海를떠나 당일當日 서울레 도착到着되 엿습니다 나와 객원일동客員一同은 한갓 평민平民의자격資格을가지고 드 러왓습니다 압흐로는 여러분과가치 우리의독입완성獨立完成을 위하야 진력盡力하겟습니다 압흐로의전국동포全國同胞가 하나이되여 우리의국가독립國家獨立의시간時間을 최소한도最小限度 단축短縮식힙시다 압흐로여러분과 접촉接觸할기회機會도만흘것이고 말할기회機會도만켓기에 오늘은다-만 나와나의동사일동同事一同이 무사無事히이곳에 도착到着 되엿다는 소식消息을 전합니다

임시정부환영臨時政府歡迎
동아일보 | 1945. 12. 14 기사

임시정부환영臨時政府歡迎
절차節次와 참가측 參加側의 주의사항注意事項

우리임시정부 수령의환국을 삼천만전국민의 총의로서 환영하고저 전국환영회에서는 오는 십구十九일상오구시부터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하기로된 임시정부개선 전국환영대회준비에대하여 각단체와 일반시민에게 다음과갓치 요망하고 잇다
각단체 간학교는물론 간정회에서는 자진해서 국기게양과시가청소에 적극협력실행할 것 참가단체는 각기수기를가저올 것 대회당일상오 십일시十一時를기하야 각사원각교회에서는 오분간게속하야타종할 것참가단체는 시간전에 입장 청열할 것 회장입구의혼잡을 피하기위하야단체는 정문 각정회와일반은 후문에 정열하야 각게원의 지시에의하야행동할 것

대한임시정부大韓臨時政府가정부政府로서지도指導하라
조선일보 | 1945.12.29. 기사

대한임시정부大韓臨時政府가정부政府로서지도指導하라
신탁통지의 놀나운소식을듯고새문밧 림시정부 숙소에는 김구金九주석이하가 구수회의를하는중이리고한다 림시정부는이미 환국한지 한달이 지낫다그러나 점령군당국과의관게 또는 국내각정당과의관게로 오늘까지 아모러한 구체적행동을하지못하고오즉 압으로진행하여나아갈방침을 신중히 협의하고잇섯슬뿐이다 우리는 림시정부요인의 괴로운심정을 알지못하는바도아니오 그처지에대하야 오늘날까지 깁흐리해외 동정을가지고 하루밧비 림시정부가 정부로서 위령올행하기를 고대하여왓다 그러나 오늘에당하야는어제와가치 이것저것생각만할때가아니다 림시정부는 오늘부터우리의정부로서 나서지아니하면안될때가왓다 새문박숙소에서덕수궁으로 나아오리 그리하야삼천만민중에게 갈바를알니리 법률을말하고 통합을말할시간이업다 림시정부자체부터 독립전선으로 나서라 이것이 오즉하나인 우리의살길이오 림시정부의갈길이다

사라졌다 끝내 부활하다

1960년 4·19혁명 이후 1992년 한중수교에 이르기까지 30여 년 동안 임시정부가 언론, 특히 일간신문에 어떻게 비쳤는지는 한 호흡으로 살펴보는 것이 좋다. 그 기간 임시정부에 대한 한국사회의 관심과 이슈의 변화가 일정한 시대적 맥락을 타고 변화해 갔기 때문이다.

제2공화국 시기 : 4·19혁명~5·16쿠데타
이 시기 김구 11주기 추도식 외에 임시정부가 미디어의 관심을 받은 경우는 김구 암살사건의 진상규명 움직임 정도였다. 4·19혁명 직후 진상규명운동이 시작되어 서울지검이 재수사를 벌이는 단계까지 가기도 했으나 성과는 미미했다. 관련보도 역시 단신 수준이었다.
숨어다니던 안두희가 진상규명운동을 하던 민간인들에게 강제연행되어 서울지검에 넘겨진 사실이 『경향신문』 1961년 4월 18일 자에 크게 보도되었다. 그러나 수사 당국이 암살의 배후를 확인하기에는 준비도 되지 않았고, 시간도 부족했다. 약 한 달 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뒤 안두희 조사는 다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 기간 중 안두희 사안 외의 임시정부 관련 보도로는 제2공화국 윤보선 대통령이 ‘임시의정원 의원’ 출신으로 소개되는 정도였다.

제3·제4공화국 시기 : 5·16쿠데타~10·26사태
임시정부를 포함해 독립운동이 정권과 미디어의 관심을 다시 받은 것은 뜻밖에도 만주군 출신 박정희 장군의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부가 독립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서훈한 일 때문이었다. 사실 이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아마도 쿠데타 세력으로서 자기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군사정부는 1962년 2월 23일, 독립운동 유공자들을 대대적으로 서훈한다고 발표했다. 그 수가 무려 208명이었다. 숫자도 숫자려니와 이는 광복 후 독립운동 유공자들에 대한 첫 서훈이나 다름없었다. 그동안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내국인은 1949년 정부수립 1주년에 수훈한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뿐이었다. 그 외에는 1950년대에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 등 국가원수급 외국인 5명에게 수여된 것이 전부였다. 이 시기 건국훈장은 일종의 의전용이었다.
1962년 2월 26일 자로 『동아일보』가 보도한 건국공로훈장 서훈자 중 1등급인 ‘중장重章’ 명단은 최익현, 이강년, 허위, 김좌진, 오동진, 민영환, 조병세, 안중근, 윤봉길, 이준, 강우규, 김구, 안창호, 신익희, 김창숙,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18명이었다. 2등급인 ‘복장複章’ 서훈자 중에는 홍범도, 지청천 장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서훈자들에 김구 안창호 등 임시정부 관계자가 여럿 포함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광복 17년이 되도록 김구, 안창호 등은 물론이고 안중근, 윤봉길 의사와 손병희 기미독립선언 대표 등이 이때까지 서훈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러나 이 서훈은 대상자 선정 및 검증에서 너무 서두르는 느낌을 주었는지 ‘지나치게 졸속’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동아일보』 2월 24일 자에서는 이번 서훈의 ‘중장 서훈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김창숙 옹이 “훈장 100개보다 하루속히 민족반역자를 없애는 것이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이라고 소감을 밝힌 것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렇게 비판할 일이라도 더 있었으면 좋으련만 1960~70년대의 제3·제4 공화국 시대를 거치면서 임시정부를 포함해 독립운동 관련 신문 기사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정부의 정책 방향이 이를 부각하지 않았던 것과 관계없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4·19혁명 직후와 마찬가지로 5·16쿠데타 직후도 ‘반짝 관심’ 수준이었다고 보는 게 맞겠다.
오히려 이 시기에 중요한 것은 민정 이양을 앞두고 1962년 12월 26일 제5차 개헌을 통해 제3공화국 헌법 전문에서 임시정부 관련 내용이 삭제되었다는 점이다.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이 ‘건립’되었다는 사실, 광복 후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했다는 사실 등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는 국가의 기원 및 정통성 인식의 단절이었다. 당대에 이를 알아채고 지적한 언론은 없었다.

제5공화국 시기
세상 일 참으로 알 수 없다. 신군부가 집권한 제5공화국 시절에 임시정부가 크게 주목받은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 1982년 4월 15일 자에 ‘임시정부의 재평가’라는 제목으로 실린 사설을 보자.

근년 민족적 정통성과 올바른 민족사관의 확립이 유달리 강조되어 왔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이제는 마땅히 그것이 차지해야 할 공평한 역사적 지위를 차지해야 할 것이다. 물론 국사책에는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지도적 핵심체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다수의 국민들의 뇌리에서는 임시정부에 대한 기억은 사라져가고 있으며 해방 후의 대한민국 정부의 모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실로 개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 직후 그 자주독립정신을 이어 받으면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민주공화국을 선언하고,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주권국가의 수립을 위해 분발투쟁해온 민족적 독립운동의 총본산이요,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이른바 ‘망명정부’였다.


이 사설의 요지는 분명하다. ‘임시정부가 차지해야 할 공평한 역사적 지위’로서 한국사 교과서에 설명된 ‘민족독립운동의 총본산’이라는 점뿐 아니라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의 모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국’이라는 점 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지난 세대의 ‘임시정부 인식’에서 크게 진전된 것이었다.
그러더니 『동아일보』 1982년 12월 6일 자 ‘1919년을 대한민국 기원으로 삼자’는 기사는 앞의 ‘임정 재평가론’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광복군 출신인 건국대 조일문 총장의 고별강연을 소개한 이 기사는 임시정부가 3·1운동의 산물인 동시에 의회 중심의 첫 민주정부였다면서 1919년과 임시정부를 ’대한민국의 기원‘으로 삼자고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1962년 제3공화국 헌법에서 사라졌던 대한민국의 기원 문제가 재론되기 시작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12·12’라는 초법적인 사태를 통해 집권한 신군부가 지배하는 1980년대였지만 한국 민주공화정의 기원을 찾아가는 이런 도도한 논의를 막을 길은 없었다. 이 ‘임시정부 정통성’ 논의는 1980년대에 대학가 등에 도입되기 시작한 북한 주체사상에 대응해 우리의 뿌리와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지식인 사회의 시도와도 맞닿아 있었다.

1987년 6·29선언과 개헌
결국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그 결과로서의 6·29선언은 1987년 10월 29일 제9차 개헌을 통해 제6공화국 헌법으로 매듭지어졌고, 임시정부는 그 전문에 명료하게 부활했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표현 안에 지난 1980년대의 모든 정통성 논의와 그 결론이 함축되어 있었다. 이 헌법이 바로 오늘날의 헌법이다.
이 모처럼의 개헌 기회에, 제헌헌법에 들어 있다가 제3공화국 이후 사라진 ‘3·1운동을 통한 대한민국의 건립’과 ‘민주독립국가의 재건’의 대의를 어떻게 복구할 것이냐는 문제는 역사학계에서는 놓칠 수 없는 과제였다. 『동아일보』 1987년 2월 23일 자에 지상중계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에 관한 학술대회’가 대표적인 경우였다. 이날 김준엽 전 고려대총장의 기조연설 가운데 주요 대목은 이렇다.

이와 같이 1948년 제헌국회의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 임정의 건국을 제1공화국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오늘의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의 근원인 동시에 정당한 통치권원統治權源임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 5·16 이후의 개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과 그 민족사 정통성’의 내용을 그 전문에서 삭제한 것은 헌정사상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다.
(…) 새로 개정되는 헌법의 전문에는 3·1독립정신의 계승과 더불어 첫째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우리 민족이 세운 민주공화국의 효시로서 제1공화국이라는 사실과, 둘째로 1919년의 상해 ‘임정’의 ‘임시헌장’이 우리 헌정사의 시점으로서 (…) 명시되어야 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족사적 정통성을 가지니 오늘날의 대한민국 정부도 임시정부에 근원을 두고 거기서 통치권의 원천을 찾으라는 말이다. 심지어 1919년의 임시정부를 제1공화국으로 인정하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 뒤 개헌안 협상과정에서 임시정부의 정통성 또는 법통 문제는 쟁점이 된 적이 없었다. 여야 모두 사전 조율을 통해 동의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넋이라도 있고 없고…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냉전 해체 뒤 1992년 8월 24일 국교를 정상화했다. 이로써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갈 수 없던 중국과 왕래가 가능해졌다.
그렇게 두 나라 관계가 자유로워지면서 성사된 일들 중의 하나가 중국 땅에 묻혀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유해 봉환이었다. 중국 관내의 상하이와 충칭은 물론이고 동북지방에도 그곳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애국지사들이 숨져 ‘무주고혼無主孤魂’으로 묻혀 있지만 1949년 중국대륙의 공산화 이후 우리는 그곳에 갈 수가 없었다.
김구 선생이 생존해 있던 1946년 6월 15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삼의사의 유해가 어렵사리 일본에서 봉환됐고, 1948년 8월 8일 이동녕, 차리석 애국지사와 곽낙원(어머니), 최준례(아내), 김인(큰아들) 등 김구 일가의 유해가 중국에서 돌아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중국의 문이 닫히며 우리는 중국 내 애국지사 묘역의 안위를 살필 길이 막혀버렸던 것이다.
그러다 한중수교 이후 봇물 터지듯 양국 교류가 늘고 유해 봉환도 정부가 나서서 추진해 1990년대 내내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과 미주 등지에서 기회가 닿는 대로 애국지사들의 유해가 돌아왔다. 그 흐름은 2020년대에도 이어지고 있으며, 언론 역시 그때마다 이 ‘넋의 귀환’ 사례들을 놓치지 않고 보도하고 있다.
그 와중에 한 가지 해프닝이 있었다. 임시의정원이 1919년 4월 10일 밤 상하이에서 역사적인 첫 회의를 갖고 임시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의한 것으로 알려진 건물과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이 숙소로 사용하던 건물이 확인됐다면서 한 사업가가 이 두 건물을 매입한 뒤 이를 해체해 무려 콘테이너 28개에 나눠 싣고 국내로 들여온 일이 있었다. 1994년 1월의 일이었다.
이 건물이 정확하게 1919년의 그 건물이라면 이는 엄청난 뉴스였다. 당연히 대부분의 언론이 이 일의 진행상황을 추적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분야를 전공한 학자들의 검증 결과, 상하이 시내의 도로명과 지번이 1940년대 이후 몇 차례 변화를 겪었는데 그런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일장춘몽이었다.

100살에 되찾은 생일

2000년대와 2010년대의 임시정부 관련 보도는 역대 대통령들의 중국 내 임시정부기념관 방문했다는 이야기와 국내에 기념관을 건립하는 문제가 본격 제기됐다는 이야기 정도로 마치고 지금 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때는 이른바 ‘건국론’과 ‘역사 국정교과서 문제’를 둘러싼 논란의 연대였다. 그 논란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역사가 엄정하게 판단할 것으로 기대한다.
다만, 이 시기에 있었던 두 가지 사실과 관련 보도만은 살펴보는 게 좋겠다. 두 가지 다 2019년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전후한 시기의 일이다. 그 중 첫째는 임시정부가 수립 100주년인 2019년에 비로소 자기 생일 ‘4월 11일’을 되찾았다는 사실이다. 이것도 다시 생각해 보면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대한민국이 자신의 법통으로 삼고 있는 임시정부의 수립일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아버지 생일을 제대로 모르던 아들 격이라고 해야 할지….
그 경위를 상세히 소개한 것이 『경향신문』 2018년 4월 16일 자 ‘여적’ 칼럼이다. 이에 따르면, 1919년 4월 10일 밤 10시 소집된 임시의정원 첫 회의가 밤샘 끝에 국호 ‘대한민국’을 결정하고 임시헌장을 채택했으며 각료들까지 선출한 것은 회의록 등으로 미뤄 의심할 여지가 없고, 임시정부가 대륙을 떠돌면서도 4월 11일에만은 꼭 ‘정부수립 기념식’을 거행했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2005년 한시준 교수(현 독립기념관장)가 이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각종 사료를 바탕으로 문제 제기한 이후 ‘4월 11일’이 역사학계의 정설로 자리 잡았고, 마침내 2018년 10월 30일 국무회의에서 기념일이 변경되었다. 그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2019년 ‘100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생일상을 받게 된 것이다. 만시지탄이었다.
둘째는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념관이 국내에 세워진 사실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는 2004년 창립 이후 줄기차게 이 문제를 제기해 왔고, 여러 갈래로 아주 구체적인 기념관 건립사업을 추진해 왔다.
그것이 마침내 2016년 서울시의 부지 제공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해 2017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임시정부기념관을 국립으로 건립하겠다는 방침을 공식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위치에 2022년 개관한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은 말하자면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관’의 성격도 갖는 것이다.
그렇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곁에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내일 임시정부는 또 다시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설까?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