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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당시 중국 신문에 보도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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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중국 신문에 보도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 글. 장세윤(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중국 언론(신문)에 다수 보도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

중국의 방대한 언론(신문) 자료에 게재된 한국 독립운동 관련 기사의 분석은 아직 연구가 많이 되지 않은 분야 중의 하나이다. 이에 『홍콩화자일보香港華字日報』·『텐진대공보天津大公報』·『상하이시보上海時報』·『신보申報』 등 주요 신문에 보도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 또는 ‘임정’으로 약칭)를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당시 중국 언론계의 인식을 통해 임시정부, 더 나아가 한국 독립운동의 진상을 해명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그것은 중국 언론에 보도된 내용이 당시 그곳에서 활약하고 있던 임시정부의 활동과 그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크게 보면 1919년 4월부터 1932년 4월 말까지의 상하이시기, 그리고 1932년 5월부터 1940년 9월 중국 국민정부의 임시수도 충칭重慶에 정착하기 전까지의 이동시기, 그 이후부터 1945년 11월 환국하기까지의 충칭시기 등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따라서 이 3단계 구분에 따라 중국 각지에서 발행되던 주요 신문을 망라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한계로 임시정부 성립 초기 주요 중국 신문의 보도, 1920~30년대 주요 신문의 보도, 그리고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이후부터 1945년 11월 환국하기까지의 시기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세번째 시기는 중국국민당을 대변하던 『중앙일보中央日報』와 중국공산당을 대변하던 『신화일보新華日報』를 중심으로 정리하기로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성립
관련 보도

1919년 3·1운동의 결과 성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약은 중국의 각 신문에 비교적 상세히 보도되었다.
1894~95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한 뒤 중국 지식층의 위기감이 확산됨에 따라 신문은 국민계몽의 “무기”로서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당시로서는 비교적 혁신적인 일간지 『시보時報』가 1904년 상하이에서 창간되었다. 원래 제호는 『시보』였으나, 상하이에서 발행되었기 때문에 흔히 ‘상하이시보’로 불렸다. 이 신문은 1911년 신해혁명 전까지는 가장 진보적 신문으로 알려졌다.
『상하이시보』는 1919년 5월 2일자에 「고려임시정부지조직高麗臨時政府之組織」, 같은 해 9월 26일자에 「한인선거임시총통韓人選擧臨時總統」, 11월 8일에 「고려혁명수령부일高麗革命首領赴日」, 같은 달 26일에 「고려대표단참여노병회高麗代表團參與勞兵會」, 1920년 1월 5일자에 「한인운동독립근문韓人運動獨立近聞」 등을 보도하였다. 특히 5월 2일 기사에서는 임시정부 내각 명단과 의정원에서 의결된 임시약법約法이 상당한 지면을 차지하며 소개되었다.
『대공보大公報』는 중국의 대표적 신문으로 1902년 6월 텐진天津에서 창간되었는데, 곧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신보』와 경쟁할 정도의 유력지로 성장했다. 처음 텐진에서 발행되었기 때문에 ‘텐진대공보天津大公報’로도 불렸다. 1936년에는 상하이판을 발간했고, 항일전쟁 기간에는 홍콩․한커우漢口·충칭에서도 간행되었다. 1926~49년까지는 국민당 계열에 속했다.

©경기도박물관

1919년 말의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신보』와 거의 비슷한 10만부를 발행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4~5만부에 불과했다. 구독자는 거의 지식계층이었다. 편집장 장계난(張季鸞, 1888~1941)은 “친한파”로서 1930~40년대 국민당정부의 임시정부 지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공보』는 1919년 4월 11일자에 「고려지임시정부高麗之臨時政府」 기사가 처음으로 보이고, 4월 14일에 「고려인지총통여각원高麗人之總統與閣員」 , 같은 달 23일 「한인청승인고려민국정부韓人請承認高麗民國政府」, 30일에 「대한민국임시약법大韓民國臨時約法」, 고려신정부지주의高麗新政府之主義」 , 5월 1일자에 「대한민국출현의大韓民國出現矣」 , 같은 달 2일에 「고려임시정부서사高麗臨時政府誓詞」 , 10월 23일에 「상해한임시정부피법국봉폐上海韓臨時政府被法國封閉」 등의 표제로 임시정부의 출범소식을 보도하였다.
『화자일보華字日報』는 1919년 4월 23일자에 ‘고려성립임시정부高麗成立臨時政府’라는 제목으로 처음 임시정부 소식을 전하였다.
화자일보는 1864년 홍콩데일리프레스(Hongkong Daily Press)지로부터 독립하여 새로 출발하였다. 이 신문의 판로는 주로 홍콩․광둥성廣東省 등 중국 화남華南지방의 지식층부터 동남아시아 등지에 거류하는 화교까지 이르렀다. 1940년 이후 일본군의 홍콩 점령으로 폐간(또는 정간)되었다.
한편 『상하이신보上海申報』는 1919년 4월 11일에 「한인설립임시정부지외신韓人設立臨時政府之外訊」, 5월 2일 「고려임시정부지조직高麗臨時政府之組織」, 9월 26일에는 「고려재호조직임시정부高麗在滬組織臨時政府」, 10월 22일에 「조선임시정부총기관천양朝鮮臨時政府總機關遷讓」 등의 기사를 보도하였다.
『신보』는 1872년 4월 중국차茶 무역상인 메이저(E. Majer, 영국인)가 상하이에서 창간한 중문신문으로 1949년 5월에 폐간되었다. 구중국 시기 발간되던 신문 가운데서는 가장 오랜 77년의 역사를 가진 신문으로써 당시 중국에서 『신문보新聞報』와 함께 최대부수를 발행하던 유력한 일간지였다.
당시 국호를 거의 ‘고려’로 표기하고 있고, ‘조선’이란 국호도 드물게 쓰이고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정식 명칭을 쓰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19년 임시정부 성립 직후 당시 중국 언론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에 생소했을 뿐만 아니라, 1919년 3·1운동의 결과 한국인들의 여망을 반영하여 성립한 ‘임시정부’가 전통적으로 익숙했던 ‘속방’ 조선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거의 대부분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세워졌다는 단순 사실보도에 그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차츰 임시정부와 관련 단체, 주요 인물들의 활약이 알려지면서 이러한 인식은 크게 바뀌게 된다.
중국 주요 지역의 각 신문은 이후 1920년대 초에 가끔 임시정부에 관한 기사를 게재하였으나, 3·1운동에 비해서는 현격히 그 빈도가 떨어지는 양상을 보였다. 이들 중국 언론매체의 한국 관련기사는 지리적으로 이웃하고 동일한 문화를 공유한 민족이라는 동정적 입장과 일제 침략의 공동 피해자로서 동병상련하는 입장에서 비롯된 성원·격려의 논조를 대체로 견지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항일전쟁 기간『중앙일보中央日報』, 『신화일보新華日報』의 보도 경향

1937년 7월부터 1945년 8월까지의 중국 항일전쟁 기간 동안 중국국민당을 대변하던 『중앙일보』와 중국공산당을 대변하던 『신화일보』의 임시정부에 대한 보도 경향을 분석해보면, 두 신문은 여러 가지 공통점을 보이면서도 상당한 차이점을 보였다. 즉 두 신문은 1937년 국공 양당의 합작에 따른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실현 방침에 따라 한국독립운동과 임시정부에 대하여 대체로 우호적 관점에서 열렬히 보도했지만, 국제정세와 중국내 항일전쟁의 양상, 국공 양당의 관계, 임시정부 등 한국독립운동 자체의 변화 등으로 각 시기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1941년 12월 일본의 태평양전쟁 도발 직후부터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이 열리는 시기에 두 신문은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보도가 대폭 늘어났다. 특히 여러 독립운동 단체 가운데 임시정부에 대한 보도로 집중되었다. 중앙일보가 16건, 신화일보가 27건이었다. 또 한국광복군에 대한 보도도 크게 증가하였다. 중앙일보가 21건, 신화일보가 29건이었다.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 직후부터 임정 요인들이 환국하는 1945년 11월까지 두 신문은 한국독립운동과 관련하여 군사분야 보다는 정치분야 보도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특징을 보였다. 임시정부 관련 보도가 중앙일보 50건, 신화일보 28건이다. 중앙일보가 거의 2배에 달한다.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지와 관심을 반영한 결과이다. 이러한 경향은 임정 주석 김구에 대한 보도에서도 나타났다. 중앙일보가 34건, 신화일보가 7건으로 조사된다. 이 시기에 이르러 중앙일보가 훨씬 더 적극적으로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에 대해 보도한 것이다. 이는 1945년 8월 전후 시기에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역량 확대를 통해, 이들이 귀국 후 새로운 국가 건설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할 것을 기대한 중국 국민당측의 관심이 반영된 것이라고 평가 할 수 있다.
보기를 들면 1944년 7월 4일자 『신화일보』는 임시정부에 대해 임정의 승인을 요구하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하여 성원을 보냈다. “임시정부는 목전 한인韓人을 대표할 수 있는 유일한 통일적 정부이므로 동맹국은 신속히 임시정부를 승인할 수 있다. 한국광복군을 적극 원조하고 중국 적후敵後와 한국 국내 한인들의 반일운동을 발전시키는 것을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이는 일본놈들의 목전 기도를 타격하는 데 필요한 조치이다.” 물론 임정 승인문제에 대해서 중국남방의 류저우柳州에서 발행되던 『류저우일보柳州日報』도 「사설 :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라!」(1942.11.22)에서 “한국임시정부는 전체 한국민족의 통일된 의지에 의해 성립되었으며, 전체 한국민족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부”라며 승인을 요구하기도 했다.

특히 중국의 항일전쟁이 끝나게 되는 1945년에 이르러 두 신문의 임정에 대한 보도는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이 1년동안 중앙일보의 임정에 대한 보도는 신화일보의 거의 7배나 되었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한 뒤 중앙일보는 이전에 비해 임정에 관한 소식을 더욱 적극적으로 보도했던 것이다. 반면에 신화일보는 오히려 중앙일보와 반대로 임정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중앙일보는 국제사회의 임시정부 정식 승인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주요 중국 신문 보도의 시사점

그동안 자료상의 한계와 우리의 무관심 탓으로 별로 조명하지 못했던 중국 신문자료가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등 한국독립운동에 대해 상당히 큰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보도하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시기별ㆍ지역적으로 중국 언론에 지속적으로 보도되고 있던 임시정부 등 한국 독립운동 관계 기사를 통해 한민족의 강인하고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새롭게 인식, 재평가할 수 있다. 중국 신문에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이 보도되었고, 그것이 다시 중국의 민족운동이나 항일전쟁, 중국인들과 한민족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그 상호작용도 적지 않았다.
다만 중국의 신문들은 주체가 아닌 제3자적 입장에서 조선(한국)이나 임시정부 등 민족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중국 언론들은 조선총독부나 일본의 식민지 정책 당국자 등 일제의 선전정책, 아니면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 세력의 역선전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여 보도할 수 있었다. 때문에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나 일제의 패망 직전인 중국 항일전쟁의 막바지 단계에 이르러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등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보도가 폭증하고, 임정의 승인이나 임정의 역량을 긍정적으로 보도하는 기사의 비중이 늘어났다. 이는 당시 임시정부의 역할과 역량이 그만큼 성장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추후 한국학계의 후속 연구를 통해 임시정부와 중국 언론과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조명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