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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인물들

『독립신문』 2대 사장 김승학

임시정부의 인물들

『독립신문』 2대 사장 김승학

희산 김승학(1881~1964)은 평북 의주 출신으로 국내에서 배일 연설, 일장기 게양 반대 운동을 하다가 1910년 10월 망명해 1919년 대한독립단 재무부장을 지냈다.

— 글. 조준희(국학인물연구소 소장)

김승학의 『독립신문』 사장 취임과 복간

©조준희

희산 김승학

희산 김승학(1881~1964)은 평북 의주 출신으로 국내에서 배일 연설, 일장기 게양 반대 운동을 하다가 1910년 10월 망명해 1919년 대한독립단 재무부장을 지냈다.
1920년 관전현에서 활약하던 김승학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2회 방문했다. 첫 번째는 1920년 2월 남만주 통일기관 명칭 승인 및 무기구입 목적이었다. 임정 군무부 직할 ‘광복군사령부’로 인가 받고 총기류 240정과 탄환 수만 발을 구입하고서 무사히 귀환했다.
두 번째는 1921년 2월 말 만주 및 국내 정세와 동지들의 체포․순국 사실을 군무부에 보고하고 지원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출발해 4월 상하이에 도착했다.

초기 『독립신문』 상황
그러나 기대했던 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이동휘가 탈퇴하고, 친일 변절자가 발생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군무부도 도움을 줄 수 없는 처지였다.
특히 기관지 『독립신문』 초대 사장 겸 주필 이광수가 일제에 투항해 귀국했고, 영업부장 이영렬마저 친일로 돌아서면서 신문사 소재지와 인쇄소 비밀 장소를 일본 영사에게 밀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제는 이를 기회 삼아 프랑스 영사관에 항의해 신문사를 봉쇄했고, 인쇄소 집기류를 압수했다.

『독립신문』 복간과 직원
김승학은 무관 학교 운영 대신 신문사 해제 방안에 대해 안창호와 논의했고, 프랑스 영사관과 교섭해 절차를 밟은 결과 1921년 7월 초(음력 5월 말)에 신문사․인쇄소가 개방되었다.
김승학은 2대 사장에 취임했고, 직원은 다음과 같이 조직되었다.

사장:김승학, 주필:박은식, 편집국장:차리석
기자:조동호, 김문세, 박영, 이윤세
인쇄소 책임자:고준택

『독립신문』 인쇄소 위치
『독립신문』 발간소는 제111호(10.5)부터 4면 상단에 “Published in Nanking, China” 라고 실제 장소와 다른 “난징”으로 표기했는데, 이는 프랑스조계 공무국 협약 2항 “독립신문 발간소는 다른 지방으로 신문지상에 명기할 것”에 따른 것이었다.
인쇄소 위치는 사장과 인쇄소 책임자만 알고, 다른 직원들은 몰랐다. 이는 협약 5항 “신문사나 인쇄소의 비밀 장소는 다수의 한인이 알지 못하도록 할 것”에 따른 것이었다.
단, 인쇄소(삼일인서관) 주소가 ‘망지로望志路 영길리永吉里 40호’로 두 번 공개된 적이 있었다. 필자가 현지 답사한바 지금의 루완구 마탕루 222호인데 옛 건물과 터는 사라졌고 화부톈디華府天地 아파트가 들어섰다.

삼일인서관 터(현 화부톈디 아파트 내 정원)

©조준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채찬(백광운)

신문사 재정과 발행 성과
학계에서는 상해판 『독립신문』 간행을 세 시기로 구분해 창간호(1919.8.21)~109호(1921.5.31)까지 이광수 운영기를 ‘초기’, 속간 110호(1921.8.15)~177호(1924.10.4)까지 김승학 운영기를 ‘중기’, 178호(1924.11.29)부터 198호(1926.11.30)까지 박은식, 최천호, 최창식 운영기를 ‘후기’로 설명한다. 중기 『독립신문』은 김승학이 3년간 총 68호를 발행했다.
신문사 재정은 임정 차입금 44.2% 외에 신문 대금과 광고 수입이 10.6%, 기부금 및 의연금이 34%를 차지했다. 특별히 의용단원 채찬(이명 백광운)과 장기초(이명 김소하)가 거금을 정기 후원해 경영난을 극복하며 간행을 유지했다.

김승학 운영 시기 『독립신문』의 특징

일제하 해외 미디어의 대표 격인 『독립신문』은 독립을 열망하는 국내외 일반 국민과 각지 독립운동가들에게 비중과 기대가 컸다. 비록 기관지였지만 언론의 독립성과 역할을 충실히 유지하고자 경영을 이원화하고 정부 비판도 가감 없이 논설로 실었다.

중문판 발행 및 한글 제호 변경
김승학은 중국인들에게 임정의 독립운동 의지를 널리 알리고 중국과 연대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중문판을 1922년 7월 20일 1호부터 40호를 발행․배포해 호응을 얻었다. 국제 여론 호소는 김승학이 독립신문을 맡고자 했던 첫 동기였다. 한인 독자들을 위해 한자 제호 “獨立新聞”을 1924년 1월 1일자 169호부터 한글로 바꾸었다.

지역 소식 세분화
국내외 소식을 효율적으로 전하기 위해 국내 정보는 초기대로 본국통신란에 실었고, 만주 소식은 만주/간도, 안동, 관전, 장백현, 길림, 봉황성, 임강통신 등에 각지 항일 전투나 투옥된 지사들의 재판 과정을 실었고, 중국 소식은 광동, 남경, 소주, 합이빈(하얼빈), 북경, 한구, 흑하통신란에 실었고, 러시아 소식은 아령, 해삼위, 치따 통산란에, 미국 소식은 미주/화성돈(워싱턴)통신란에 실었다.

관동대지진 사건 특파원 보도
『독립신문』 중기의 가장 큰 사건은 1923년 9월에 발생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이었다. 김승학은 생생하고 정확한 보도를 위해 특파원을 활용했는데 나고야의 한세복(본명 한광수)을 도쿄에 파견해 진상을 조사하게 했다. 1923년 9월 4일자 호외를 시작으로 9월 19일자 164호부터 1924년 2월 2일자 171호까지 8호에 걸쳐 대지진과 한인 피해 상황 기사를 내보냈는데 167호(12.5)에 특파원 1신 「일만의 희생자!!!」를 1면 기사로 싣고, 피학살자 수를 6,661명으로 보도했다. 일본에서 학살 현장을 목격했던 오토 부르하르트(Otto Burchardt) 박사를 독일 유덕고려학우회 고일청과 황진남이 직접 인터뷰해 2회(168․170호) 게재한 점도 돋보인다.

사설, 시가
『독립신문』 1면에는 주필의 사설이 실렸다. 4면에는 주로 독자 투고가 실렸는데 신문사 기자 내지 기고자의 국문시가나 한시도 익명, 이명, 실명으로 꾸준히 발표되었으며 저항과 우국 심정이 담기고 인상 깊은 작품이 다수 보인다.
1922년 5월 27일자 127호 1면의 「꽃다운 죽음」, “먹기 위해 사느냐, 죽기 위해 사느냐. 잘 죽으려 살다가, 잘 살려고 죽어라. 우리의 오늘날 처세 목적은 사수 독립” 익명 시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1922년 3월 1일자 121호에 민족대표 33인 김병조 목사가 삼일절 기념으로 기고한 「독립선언기념」 이합체시도 주목된다.

단의 편견을 가져 대사업을 소극적으로 고집하지 말고,
지를 굳건히 하여 민족의 통일적 정신을 기성期成[이루어지길 기약]하라.
전을 하려거든 이천만 동포의 자각을 격발激發[격렬히 일어나게]하여라.
충신 행독경[말은 공변되고 미더우며 행실은 돈독하고 경건해야 함]은 성현군자의 위공偉功[위업]을 성하는 요법要法이니라.
강이 문란하면 경장更張[고쳐 새롭게 함]하기 전에는 만사 불성不成하나니,
자재자念玆在玆[자꾸 생각해 잊지 않음]할 것은 오직 금일을 각심각골恪心刻骨[삼가 마음과 뼈에 새김]할지어다.

영정 사진 증가
한 장의 사진을 당시 신문에 싣기 위해서는 사진 제판 시설을 갖추고 여러 복잡한 단계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중기에는 사진 11컷이 사용되었는데 그 중 7컷이 부고 영정(손병희, 신규식, 스나이더 부인, 김교헌, 김광추, 박상만, 채찬) 그리고 단군 영정 1컷으로 확인된다. 나머지 3컷(27.3%) 생존 지사는 독일 유덕고려학우회원, 윤해, 의열단원 김지섭이다.
사진 게재 비율은 초기와 차이 나지 않지만, 사망자로 3·1운동 희생자 사진만 4컷이었고, 나머지 15컷(79%)이 국내외 동포들의 활동이나 생존 인물의 사진을 실었던 점에 비해 1/3로 확연히 축소되었다. 추모를 중시하는 한편 지사들의 개인정보를 노출시키지 않으려 했던 점을 엿볼 수 있다.

서적 공익 광고
광고는 신문사 수익에서 필요한 부분이었지만, 출판물의 공익 홍보 위주로 실렸다. 김교헌의 『배달족역사』, 김두봉의 『깁더조선말본』,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사략』(상편), 박은식의 『이순신전』, 이춘갑의 『상해흥업지남』, 김교헌의 『신단민사』가 차례로 광고되었다.

김승학의 사임

김승학은 임정의 신망을 받으며 1924년 4월 의정원 평안도대의원, 5월 학무부 차장, 학무부 총장 대리로 승진했다.
그런데 9월 14일, 통의부와 참의부 간 갈등이 고조되다가 참의장 겸 제1중대장 채찬이 통의부원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에 10월 4일자 『독립신문』 177호에 통의부 비판 사설(「남만사변을 듣고」)과 참의부의 통의부 「성토문」을 싣고 동지 채찬에 대한 추모로 지면을 채웠다. 이를 본 통의부 측에서 격분해 11월 7개 단체와 연합, 반임정 선언 및 독립신문 구독 금지 내용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김승학은 예기치 않게 독립운동 단체 명의의 큰 반발을 사자 부담을 느끼고 11월 15일 사임한 뒤 끝내 상하이를 떠나게 되었다. 그 후 내몽골로 스승 조병준을 찾아가 임정 직할 단체인 의민부 총무부장을 맡았다가 1927년 10월 참의부 4대 참의장에 임명되어 서간도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힘쓰던 중 1929년 일경에 붙잡혀 5년 간 옥고를 치렀다. 1962년 정부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김승학은 서간도 항일투사․임정 지지 언론인․『한국독립사』 집필 역사가로서 한국독립운동사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향후 기념관 내에 『독립신문』 공간이 별도 마련되어 지사의 업적을 기리고 미디어를 통한 애국애족 정신 계승 시민이 많이 배출되기를 바란다.

국립대전현충원 김승학 지사 묘소(4묘역 495)

©조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