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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터와 길

100년 전 뜨거운 시간 속으로 상하이 독립운동 사적지 여행

독립의 터와 길

100년 전 뜨거운 시간 속으로 상하이 독립운동 사적지 여행

도시의 주된 인상이 건축물에서 오는 만큼, 상하이에서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100년 전으로 시간 여행이라도 온 듯한 기분이 든다. 100년 전 상하이에 살았던 독립운동가들이 본 풍경도 지금 우리가 보는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는 얘기다.

— 글. 도선미(여행작가)

©도선미

스쿠먼 농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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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쿠먼 농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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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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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_김구 선생 집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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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의사 생애사적 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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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커우 의거 당시 단상이 있던 장소. 현재는 루쉰 공원 광장으로 바뀌었다.

100년 전 상하이와 독립운동
와이탄에서 뒷골목까지

중국 상하이는 아시아의 여러 도시 중 20세기 초반의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한 도시일 것이다.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황푸강변 와이탄外滩과 난징동루南京东路 일대만 해도 당시 주류를 이뤘던 신고전주의 건축물이 수십기나 이어지는데, 도시 전체로 치면 이런 역사 건축물이 총 630기에 이른다. 도시의 주된 인상이 건축물에서 오는 만큼, 상하이에서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100년 전으로 시간 여행이라도 온 듯한 기분이 든다. 100년 전 상하이에 살았던 독립운동가들이 본 풍경도 지금 우리가 보는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는 얘기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임시정부와 항일 단체들은 상하이로 거점을 옮겨 투쟁을 이어갔다. 영국과 프랑스, 미국의 조계지가 뒤섞여 있던 국제도시 상하이는 서방 국가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고,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대의를 도모할 적격지였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영화 '밀정(2016)', ‘암살(2015)’, ‘아나키스트(2000)’ 등 임시정부 활동과 국외 독립 운동을 다룬 영화에는 빠짐없이 상하이가 등장한다. 영화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상하이의 뒷골목 농탕弄堂, 서양식 연립주택과 중국식 사합원 주택이 합쳐진 스쿠먼石库门도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풍경이다.
아마 영화를 보고 나서 가슴이 뜨거워진 나머지 상하이의 독립 운동 성지를 순례해야겠다, 선조들의 숭고한 발자취를 되짚어 봐야겠다 결심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의롭고 맹렬했던 독립 투사들의 흔적은 이제 거의 사라지고 없다. 그래도 유일하게 남아있어 위안을 주는 곳이 옛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大韓民國臨時政府舊址와 루쉰 공원의 매정梅亭이다.

김구 선생의 처절한 애국혼이 깃든 곳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13일 상하이 조계지였던 김신부로(현 서금2로瑞金二路) 청사에서 출범했다. 중국과 한반도 각지에 산발한 임시정부를 통합했고,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 내무총장은 안창호, 경무국장은 김구를 선임했다. 헌법에 명시한 대로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나라이니, 지금의 대한민국은 상하이에서 탄생한 셈이다. 임시정부는 그 후로 프랑스 조계지 안에서 여러 차례 이전했지만, 현재 남아있는 곳은 보경로(현 마랑로馬當路) 청사 뿐이다. 보경로 청사는 1926년 7월부터 1932년 4월까지 임시정부가 가장 오랫동안 사용한 청사이자, 상하이에서 마지막으로 머문 청사이다. 이후 임시정부는 상하이 시대를 끝내고, 항저우杭州로 이주한다. 중국과의 오랜 단교로, 보경로 청사 역시 영영 잊히고 버려질 뻔했지만, 1993년 철거 직전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광 명소인 신톈디新天地에 왔다가 근처 보경로 청사에 들른 외국인 관광객들은 실망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리기도 한다. 전형적인 3층 스쿠먼石庫門 가옥 형태인 청사가 허름하고 볼품없어서다. 1층은 부엌, 2층은 집무실, 3층은 침실로 쓰였는데, 방이 달랑 4개 뿐이다. 한 나라의 살림이 이토록 작은 곳에서 꾸려졌다니 서글픔이 밀려왔다. 타국의 초라한 셋집에서 언제가 될지 모르는 독립을 위해 하루하루 싸워간 그분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가슴 한 켠이 뻐근해져온다.
영화 ‘밀정’에는 “임시정부는 거지꼴이고 장관은 돈이나 꾸러 다닌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보경로 청사 시절 임시정부가 실제 그랬다. 당시 국무령으로 최고 수반이었던 김구 선생은 이곳 2층 집무실에서 “참담하고 고난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최대, 최후의 결심”을 하고 『백범일지』 상권을 썼다. 1930년에 들어서자 임시정부는 갈수록 커지는 일제의 위세와 극심한 재정난, 인재난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상하이의 독립운동자 수는 수천명에서 수십명으로 줄었고, 임시정부는 청사 집세 30위안을 내지 못해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김구 선생 스스로 자책하며 “고대광실이 걸인의 소굴이 된 형편”이라고 할 만큼 임시정부는 무정부 상태에 가까웠다.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 바로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의거였다. 이봉창 의사의 도쿄 거사는 안타깝게 실패했지만,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거사에 성공했다.

윤봉길 열사의 숭고한 희생 정신을 기리는 곳
‘윤봉길의사 생애사적 전시관’

개인의 희생을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가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력과 희망을 불어넣은 것만은 분명하다. 고향이 충남 덕산인 윤 의사는 아내와 어린 아들을 두고 오로지 독립운동을 위해 혈혈단신으로 상하이에 왔다. 채소 장사를 하며 와신상담하던 그는 어느 날 김구를 찾아간다. 일본이 중국과의 전쟁(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고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결심에서였다. 김구는 윤봉길 의사에게 어려운 제안을 꺼냈다. 전쟁 승리와 일왕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홍커우 공원에서 성대한 축하 행사가 열리는데, 여기 참석한 고위 인사들을 폭탄으로 저격하자는 것이었다. 윤봉길 의사는 망설임 없이 응했다.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1932년 4월 29일의 홍커우 의거는 그렇게 시작됐다.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 공원에서 던진 것은 도시락 폭탄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수통 폭탄도 함께 던졌다. 도시락 폭탄은 불발했고, 수통 폭탄은 터져서 상하이 거류민 단장이었던 가와바타 사다지河端貞次를 비롯해 일본군 고위 인사 7명을 사살했다. 이 사건은 로이터통신 등에 보도되며 대한민국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임시정부는 정체된 활동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김구는 애꿎은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배후임을 밝혔다. 일본 경찰은 그를 잡는데 혈안이 되어 60만위안(현 200억원 상당)의 현상금을 걸었고, 결국 김구와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게 됐다.
홍커우 공원은 현재 루쉰 공원鲁迅公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장소는 현재의 루쉰공원 루쉰묘 앞 광장이다. 그의 행적을 기리는 ‘윤봉길의사 생애사적 전시관’이 공원 북쪽에 있다. 규모는 작지만 윤봉길 의사의 삶과 의거 전후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는 곳이다. 시내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외곽이지만,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한국인들 그리고 종종 중국인들이 적지 않게 이곳을 찾는다. 2023년 우리는 달콤한 여행의 설렘을 안고 상하이를 찾지만 1923년의 선조들은 조국을 떠나는 착잡한 마음과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상하이를 찾았다. 지금 우리가 상하이를 여행하며 누리는 행복은 후손들이 자주 독립국 대한민국에서 당당하게 살길 바랐던 선조들의 노력에 빚지고 있다. 전시관을 돌아보고 나서 드는 생각이다.
윤봉길 의사는 의거 현장에서 검거돼 그해 12월19일 일본 가나자와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의 나이 겨우 스물다섯살이었다. 전시관에서 그가 망명길에 오르기 전 썼다는 글을 보곤 먹먹함에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윤봉길 의사가 남긴 뜨거운 문장으로 이 미진한 원고를 마치고자 한다.

“우리 청년 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도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